[연극]오태석 작·연출 <천년의 수인>
  • 魯順同 기자 ()
  • 승인 1998.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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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석 작·연출 <천년의 수인>/안두희 입 통해 ‘어거지 역사’ 조롱
“맞아요. 내 신생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첫 번째 단추를 망가뜨린 장본인이요. 그래도 나 김일성은 아니야. 김일성 아니고 대한민국의 포병 장교야. 포병 장교 안두희.” 김 구 선생을 살해해 민족의 반역자로 지탄받아 온 안두희(이호재)와 50여 년 동안 비전향 장기수로 살아온 한 노인(전무송), 그리고 광주에서 시민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진압군 병사(이명호)가 한 병실에서 만난다.

오태석씨(58)가 쓰고 연출하는 <천년의 수인> (5월8일∼6월14일·동숭아트센터)은 역사 속에 갇혀 있는 세 사람을 무대에 끌어낸다. 천년의 수인이라는 제목은 작품의 주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천년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그래서 진화하지 못한 현대사를 가리킨다.

오태석씨는 96년 버스 운전 기사 박기서씨가 안두희씨를 살해한 사건을 접하고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한 사건이 50년도 가는구나. 역사가 바뀐 것이 없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하고 현대사를 반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연극에서 안두희를 옹호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그를 통해 현대사를 조롱하는 데 주력한다. 그를 심문하는 조사단원들은 사실 규명에는 관심이 없고 조사를 했다는 기록을 남기는 데 급급하다. 그에게는 시위 진압 과정에서 ‘쏘라는 놈은 없고 쏜 놈만 있는’ 현실도 요령부득이다. 역사를 비난할 자격을 갖지 못한 자의 눈에도 현대사는 어거지투성이인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대사와 시각 이미지가 입체적으로 어우러지는 자신의 연출 스타일을 밀고 나간다. 강박증에 시달리는 등장 인물의 상황에 걸맞게 대사는 반복이 두드러지고, 그 변주에 따라 무대가 리듬감 있게 흘러간다.

“기억해 봐, 금남로 금남로 금남로. 이쪽에 오복양복점 있고, 이쪽에 행원갈비집 있고. 길가에 은행나무 줄섰고, 나 봤지? 나 봐, 나 쐈지? 나 겨눠, 나 쐈지? 나 쏴, 쏴, 쏴, 쏴.”

인물의 내면은 괴기스러운 이미지와 상징적인 몸 동작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오태석씨의 입체적인 연출 못지 않게, 분열된 안두희의 성격을 빚어내는 이호재의 연기도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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