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역사는 끝났는가>
  • 최 성 (고려대 강사·정치외교학) ()
  • 승인 1995.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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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사회사상집 <역사는 끝났는가>/허무주의 대안 제시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정치 밖에 설 수 없다.’ 이 말이 처음 유행하기 시작한 때는 70년대 후반이었던 것 같다. 그때 이후 한국은 엄청난 지성의 양을 축적하는 비약을 이루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세계의 존재 양식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가 제기되면서, 그리고 그런 여파들과 더불어 한국의 정치 세력 관계들이 난마처럼 뒤얽히면서 여기에 큰 변화가 왔다.

반향은 컸다. 80년대까지를 지배했던 모든 사회적 사안들에 대한 ‘상층권력 투쟁’ 중심의 인식 체계가 무너지면서 역사적 허무주의가 증폭하고, 각 분야 지식인들은 멀리 ‘정치 밖으로’ 물러앉아 버렸다. 또한 한국 민중을 들뜨게 하던 대안적 상상력도 고갈되어 버렸다.

송두율 사회사상집 <역사는 끝났는가>(당대출판사)가 놓이는 자리는 바로 이곳이다. 이 책은 내가 지금 제기한 문제들을 정반대로 보여준다. 그는 지금도 ‘정치’안에 서 있으며 ‘몰락 이후’ 세계의 존재 양식에 대해서 해명하고 있고, 또 불투명하고 두려운 미래에 대한 풍부한 대안적 상상력으로 충만해 있다.

유럽과 미국의 허구적 인식을 지적

이 책은 특히 두 가지 점에서 ‘90년대적 교과서’의 자격을 획득하고 있다. 하나는 ‘탈냉전시대’의 의미에 대한 전지구적 포착이다.

그는 ‘탈현대’를 논하는 모든 ‘포스트’ 이론들을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예컨대 후쿠야마나 보드리야르가 미국과 유럽의 극히 제한된 인식만으로 역사를 속단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허구적 인식을 제3세계의 눈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사안마다 실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천착했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냥 지성이 아닌 ‘민족 지성’을 이야기한다. 특히 우리의 지성이 아니면 포착할 수 없는 ‘민중’적 담론에 대해서, 그리고 또 90년대 들어 국제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북한의 문제를 김주석이 죽고 난 이전과 이후의 추이에 따라 평가한다.

그가 북한 사회를 분석할 때 사용하는 ‘내재적 방법론’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남북한 사회를 객관적인 위치에서 바라보는 그의 논의는, 민족의 통합을 지향하는 연구자들은 물론 자기 시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토론하고 검증해야 할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아쉬움이라면, 지난 대선 이후 한국 지식인들에게 퍼졌던 역사적 허무주의에 대한 체감일 것이다. 그의 문맥에 흐르는, 조국의 공기를 체감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갈증은 그가 ‘탈냉전시대의 마지막 냉전시대’ 목소리를 실감케 해주는 한편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살의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를 ‘한국의 상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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