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분석] '곰팡내' 사라지는 인사동 거리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9.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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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의 주말 일과는 비교적 느지막한 시간에 시작된다. 10월9일 토요일 오전 10시30분. 인사동 입구에서부터 안국동 네거리까지 줄지어 늘어선 골동품상·표구사·필방·찻집·공예품점·화랑·고서점 들이 저마다 셔터를 올리고 하루 일과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이 시각, 거리에는 노점상도 하나 둘씩 좌판을 벌린다.

좌판에 담긴 내용물은 다종·다양하다. 가짓수로는 모조 장신구, 울릉도 호박엿, 떡볶이와 어묵, 주로 외국인 관광객의 호기심을 겨냥하여 그린 듯한 낯선 관상쟁이용 인물화…. 비슷한 시각, 인사동 거리가 시작되는 곳과 끝나는 곳에는 이미 한 자원봉사단체가 운영하는 임시 안내소가 들어서서 방문객을 맞고 있다. 이들은 석 달 전부터 관광공사와 종로구청 후원을 받아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활동해 왔다.

오전 11시께. 거리가 서서히 붐비기 시작한다. 일찌감치 인사동 관광에 나선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부산하다. 여고생들의 발길도 부쩍 늘어난다. 인사동이 학교가 시행하는 ‘체험 학습’의 단골 코스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불어남에 따라 조용했던 거리도 점점 번잡해진다. 관훈동과 인사동을 관통하는 이른바 ‘인사동길’에는 종로 쪽으로 빠져나가려는 차량 행렬이 이따금씩 길을 가로질러 건너려는 사람들과 뒤엉켜 굼벵이 걸음을 한다. 직장에서 업무가 끝나는 주말 오후에 접어들자 인파는 더 불어나 거리는 온통 사람 물결이다. 밤이 이슥해져 밤이슬이 옷깃을 적실 즈음에 이르러서야 인사동의 하루는 끝을 맺는다.오늘날의 모습 갖추는 데 80~90년 걸려

인사동은 오늘날 자타가 공인하는 문화의 거리로 각광받고 있다. 인사동이 사람을 빨아들이는 가장 큰 이유는 인사동에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인사동에 가면 고미술품점·화랑·표구사·화방·필방·공예품점을 볼 수 있다. 특히 골동품상의 경우 서울 시내 전체 골동품점의 절반 가까이가 몰려 있다. 필방은 서울 시내 전체의 92%가 인사동에 있으며, 지금은 많이 빠져나갔지만 그림 전시회가 열리는 화랑도 서울 전체의 40% 가까이가 밀집해 있다. 또 인사동에 가면 팔도의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인사동에는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비좁은 골목길이 있다.

그러나 인사동이 본격적으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줄잡아 80~90년에 걸친 시간의 퇴적이 있었다. 향토 사학자 김용봉씨 설명에 따르면, 옛날의 인사동 거리에는 골동품·고서적을 취급하는 상인과 화랑은 없었다. 대신 유명한 가구점과 병원 그리고 규모가 큰 전통 한옥이 많았다. 이곳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때는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해 본격적으로 식민 통치를 하던 무렵이다.광복 이후 ‘메리의 거리’로 불리기도

골동품 상가가 등장한 시기는 대략 1910년께, 거간 상인들이 북촌 마을 부자들의 골동품과 민속품을 수집해 내놓기 시작하던 때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1920년대 명동·충무로에 흩어져 있던 골동품상들이 땅값과 임대료 상승을 이기지 못하고 인사동으로 몰려들면서 본격적으로 골동품 상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일제 때 인사동을 드나들던 주요 고객은 일본인들이었지만, 광복 이후 미군이 들어오면서 주 고객이 미국인으로 바뀌어 인사동은 한때 ‘메리의 거리’로 통하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고서점들도 인사동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금 낙원시장 쪽에 일부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떡집은, 51년 문을 연 평양떡집을 시초로 20여 개쯤 생겨나면서 ‘장안의 명소’로 각광받았다. 50년대 말부터는 고급 요정과 한정식집이 들어섰고, 60년대에 들어서자 구하산방을 비롯한 필방과 지업사·표구점이 인사동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70년대, 화랑이 하나둘씩 이곳에 문을 열면서 인사동은 화랑과 골동품점과 표구사가 어우러져 오늘날과 같은 전통과 예술의 거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동안 인사동을 거쳐 간 명사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청전 이상범·이당 김은호·소정 변관식에서부터 운보 김기창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화가들은 거의 모두가 인사동을 거쳐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인사동은 예술가들의 요람이기 되기도 했다. 대학 교수·문인·언론인 등 지식인들은 지금도 수시로 드나든다. ‘통문관’ ‘영창서관’ ‘삼중당’ 같은 고서점이 이들이 단골로 찾는 고서점이었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인사동을 특징 짓는 것은 인사동만이 지닌 독특한 경관이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주택가가 아닌 상권으로서 인사동만큼 옛 경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인사동은 높아 보아야 5층 남짓한 나지막한 건물, 그리고 아직도 옛 자취가 남아 있는 한옥들과, 다닥다닥 지붕을 맞댄 한옥들을 이리저리 연결하는 비좁은 골목길로 구성되어 있다. 한때 인사동에는 구한말 민씨 일가와 개화파의 거두 박영효 등 고관들의 대저택이 있었다. 그러다가 개화기와 일제를 거치면서 이들 저택들이 잘게 쪼개지고 ‘개량 한옥’이 들어서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차 없는 거리 행사, 고풍스런 분위기 망쳐

인사동은 현재 행정 구역으로는 인사동이 아니라 종로 일부와 율곡로·우정국로·낙원동길을 경계로 하는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인다. 원래 인사동이라는 이름은 1914년 총독부가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지은 것인데, 조선 시대 이름이었던 관인방의 ‘인’자와 대사동의 ‘사’ 자를 따서 만들었다. 대사동은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원각사와 흥복사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다.

최근의 인사동은 주말에는 물론 평일에도 이곳을 찾는 각양 각색 방문객의 물결로 요동친다. 거리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건물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겉으로는 거리가 시간이 지날수록‘장 마당’처럼 활기를 얻어가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실제로는 인사동을 대표했던 골동품상·고미술상이 잇달아 자리를 뜨면서 오히려 전통의 맛을 잃어가고 있다. 거리가 젊어지고 있는 만큼 오랜 시간의 퇴적을 자랑했던 인사동 거리의 생명력이 빠르게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인사동에 이른바 ‘차 없는 거리’가 시행되면서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인사동의 ‘차 없는 거리 문화 행사’는 97년 4월부터 시작되었다. 차 없는 거리는 매주 일요일 인사동 일대에 차량 통행을 금지하는 것이다. 인사전통문화보존회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이 행사는, 원래는 위축되어 가는 인사동 문화를 살리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그러나 차 없는 거리가 시행되자 인사동의 차분하고 고풍스럽던 분위기가 급속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일요일마다 10만~20만 인파가 몰려들자 거리에는 노점상이 등장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거리의 모습도 이들의 취향에 맞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운치가 있던 골목길은 최근 들어 부쩍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 아예 ‘먹자 골목’으로 변하고 있다. 골동품점이 있던 자리에는 카페가 들어서고, 심지어는 단란주점과 전자오락실까지 진출했다. 단층집은 몇 채씩 헐리고 그 자리에 덩지 크고 키도 큰 현대식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잘게 쪼개진 필지를 한데 묶어 건물을 올리는 이른바 ‘합필(合筆) 개발’ 방식이 등장한 것이다.젊은이들 출입 잦아지자 ‘흥청망청’

인사동의 변화가 이 지역의 정체성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는 화랑이나 골동품상 등 이른바 전통 문화 업체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민연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사동 화랑은 90년대 초반 1백60여 개에서 오늘날 백여 개로 줄었다. 크고 작은 화랑 60여 개가 10년 남짓에, 특히 화랑 경기가 좋지 않았던 IMF 한파 이후 많이 사라진 것이다.

인사동에서 오랫동안 영업해 온 골동품상·도자기점 들도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다. 거리의 흥청거림은 임대료 상승을 압박하고, 이같은 현상이 다시 대부분 건물에 세들어 영업을 해온 이들을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인사동길에서 10년째 고서화·목기·도자기를 취급해온 일화랑 주인 한종대씨는 “IMF 사태 이후 임대료가 오른 곳은 인사동을 빼놓고 찾아보기 힘들다. 임대료 부담을 감당할 수 없어, 비슷한 가게를 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이전을 논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도 조만간 가게를 옮기려고 한다”라고 말한다.

인사동의 흥청거림을 빛 좋은 개살구 정도로 여기는 상인들도 많다. 최근의 인사동에는 특히 고등학생·대학생 등 젊은 사람들의 출입이 두드러지는데, 경제력이 없게 마련인 이들은 골동품점이나 고미술 화랑의 진열장을 채운 값비싼 물건을 눈요기만 하고 만다. 인사동 사람들, 개발 방향 놓고 논란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6년간 도자기를 취급하고 있다는 ‘보원요’의 윤진학씨는 “진짜 도자기를 사려는 사람은 최소한 40대를 넘긴,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거리가 번잡해지면서 이들의 발길이 끊기고 있다. 그래서 일부 민예품점은 젊은이들의 눈길을 끌 값싼 물건들을 문앞에 내놓고 있다”라고 말한다. 품격이 있던 인사동 거리가 점점 ‘싸구려’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사동 거리에 큰 변화가 일면서, 변화의 물결을 고유한 정체성과 어떻게 공존시킬까 하는 문제가 이 지역 사람들의 최대 숙제로 떠오르고 있다. 인사동이 새롭게 탈바꿈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지만, 과연 어느 선에서 변화와 타협해야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쉽게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가로 정비 계획’이나, 인사동을 ‘문화 특구’로 지정해 문화적 특성을 그대로 살려 가려는 움직임을 둘러싼 논란도 이같은 고민의 일단을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이같은 계획이 인사동의 미래와 관련해 시급히 실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또 다른 일각에서는 이 계획이 자칫 인사동의 고유 분위기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며 크게 걱정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원칙 없는 논쟁을 되풀이하며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전통 문화 공간으로 기능해온 인사동이 점점 더 설자리를 잃어 갈 것이라는 점이다. 서울 한복판에 남은 마지막 역사·문화 공간, 그래서 ‘서울 도심의 개펄’로도 불리는 인사동은 그렇게 어수선한 변신의 갈림길에서 새 천년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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