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선] 연극 <아마조네스의 꿈>
  • 이영미 (연극 평론가) ()
  • 승인 1995.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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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여성 억압에 대한 성찰
바버라 워커라는 여성 학자의 소설을 한국식으로 번안·각색한 연극 <아마조네스의 꿈>(전혜성 각색·윤영선 연출)이 만들어낸 여성 무사 에테는 남성 중심적인 상상력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인간형이다.

원시 모계 사회로부터 현대의 한국에 떨어진 에테가 우연히 여성학자인 이혼녀 인화에게 구조되는 설정이 재미있다. 이 극은 현대 사회와 다른 문화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놓고 둘을 충돌시킴으로써 여태껏 당연스럽게 여겨왔던 현대 여성의 삶과 여성관, 여성의 의식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것인가를 보여준다. 또한 억압이 없었던 사회의 인간형을 제시한다.

특히 이 작품은 여성의 몸과 성을 생명의 근원으로 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자는 얌전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 생리혈은 더럽고 창피한 것이라는 생각, 비정상적이고 폐쇄적인 부부 관계, 성교를 불쾌하고 모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현상을 ‘억압을 모르는 여성’ 에테는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인화조차 떨쳐버리지 못한 억압을 에테는 파헤친다.

문명 사회라고 하면서도 성폭행과 같은 야만적인 범죄가 횡행하는 이 사회에 대해 에테가 “이곳의 어머니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라고 외치는 장면, 인화의 남동생과 섹스를 하다 말고 “사랑하자고 했지 아이를 갖자고 한 게 아닌데 왜 내 몸 안에 쏟아붓는 거야?”라고 외치는 장면,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은 잡아가지 않으면서 그 남편을 혼내주는 에테의 행위는 불법이라 치부하는 현상에 대해 “이곳의 법은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일갈하는 장면은 지금의 상식과 제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웅변한다.

여성문화예술기획이 이미 공연한 연극 <자기만의 방>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일방적 강의나, 인물에 대한 감정 이입을 통해 정서적 감동을 주고 있다면, 이 작품은 지적인 대비를 통해 이성적인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40대 이상 주부 관람객을 적잖이 잃겠지만, 젊은 관객들의 이성적 관람과 토론 촉발이 이루어진다면 매우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갈등과 문제를 던져놓고 충분히 발전시키지 않은 영화·소설 기법의 장면들이 연극의 내용에 적잖은 걸림돌이 되었다. 특히 에테와 인화의 팽팽한 대립과 상호 침투 과정 구축은 아직 부족하다. 그러나 배우 김수기는 에테의 억압 없는 자유로움을 건강한 몸의 이미지로 표현하여, 날씬하지 않은 근육질 여자가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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