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세밀화로 그린 <동·식물 도감>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8.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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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어린이 동·식물 도감>/화가 5명이 9년간 수채화로 그려
처음에는 사소한 동기에서 출발했다. 화가 이태수씨는 밥벌이를 하려고 출판 미술에 관여했다가 이 일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어린이 그림책을 만들면서 동·식물을 그리려 해도 마땅히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었다. 국어에 견주어 말한다면, 우리말 사전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연을 보호하자는 소리는 점차 높아졌으나, 자연의 실제 모습이 어떠한가를 정밀하게 보여주는 사전조차 없었던 것이다. 화가가 직접 나서서 실물을 하나하나 정밀하게 그림으로 옮기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 그림들이 모여 ‘도감’으로 결실을 맺었다.

정밀성·예술성 ‘두 마리 토끼’ 사냥

지난해 12월에 이어 최근에 잇달아 출판된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식물 도감> 과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동물 도감>(도서출판 보리)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나온 ‘자연 사전’이다. 제목에 어린이라는 말이 붙어 있지만, 그림과 함께 실린 글만 어린이를 위해 썼을 뿐 동·식물을 묘사한 그림은 전문 학자들에게도 유용한 기초 자료이다.

한국의 동물과 식물을 세밀화로 기록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 작업에 참여한 전문 화가는 모두 5명. 90년 초 이태수씨(도토리기획 대표)가 이 작업에 착수한 뒤 권혁도·윤봉선·이제호·정태련 씨가 ‘도토리기획’이라는 팀을 만들어 그림을 함께 그려 왔다. 전업 한국화가·서양화가이던 이들은 모두 ‘동·식물 세밀화 작가’로 직함을 바꾸었다. 평생을 걸어도 좋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기에 가능했다. 이들에게는 이 땅의 동·식물들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묘사하는 일이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감의 첫 번째 독자를 어린이로 정한 까닭은, 어린이들이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그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도감에 각각 들어 있는 1백60가지 동물과 식물은 모두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들이다. 자연 교과서뿐 아니라 국어 읽기 책,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는 동·식물을 두루 뽑았다. 이를테면 <오빠 생각>이라는 노래에서는 뜸북새와 뻐꾹새를 얻을 수 있었다.

교육계는 물론 관련 학계는 도토리기획이 만든 동·식물 도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동·식물을 정확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애쓴 점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세밀화 도감 전통이 깊은 서양에서도, 도감은 일반적으로 한 가지 특징만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정밀 묘사를 통해 동·식물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알려 주거나, 정밀 묘사는 조금 떨어져도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밀화 작업을 한국에서 처음 시도하는 만큼 도토리기획팀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다는 목표를 세웠다. 어린이들이 첫 번째 독자라는 사실도 크게 작용했다. “도감의 그림들은 주로 정보 전달에 무게 중심을 두지만, 우리는 어린이들이 1차 독자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들이 자연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게 도감 작업의 핵심이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들지만 동·식물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데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식물 도감 편집을 맡은 도토리기획 심조원 실장의 말이다.
도감에 실린 그림의 원화는 30×40㎝ 종이에 수채화로 그렸다. 2백여 년 전부터 동·식물 도감을 만들어 온 서양에서는 주로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고 있으나, 한국의 동·식물 들을 표현하는 데는 수채화가 가장 적절한 재료라고 판단했다. “초기에 아크릴·연필·색연필 등 여러 재료를 실험해 본 결과 수채화가 가장 잘 어울렸다. 몸집이 크고 화려한 서양 것들과는 달리, 우리 동·식물들은 작지만 담백하고 깔끔하기 때문이다”라고 이태수씨는 말했다. 아크릴은 덧칠이 가능하지만 수채화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아 숱한 시행 착오를 겪어야 했다.

정확한 그림 그리기 위해 시골로 이사하기도

수채화로 정교하게 묘사한 동·식물은 사진보다 훨씬 더 사실적이다. 사진은 렌즈의 초점을 부분과 전체 중 한 군데밖에 맞출 수 없다. 그러나 화가의 눈으로 보고 그린 세밀화는 부분과 전체를 한꺼번에 묘사해낸다. 또 사진은 빛이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나는 반면, 사람의 눈과 손으로 그린 세밀화는 빛에 구애되지 않는다.

화가들은 가능한 한 가장 어려운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 한 점을 완성하는 데 보통 열흘에서 보름이 걸렸다. 현장에 나가 스케치하고 사진을 찍은 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전문가의 감수를 받은 다음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곤충·식물처럼 채집이 가능한 것들은 화실로 옮겨와 세밀하게 살펴보기도 했다. 쉽게 시드는 식물은 여러 개를 화분에 심어 놓고 번갈아 관찰했으며, 토종 민들레처럼 한 철 잠깐 꽃이 피는 시기를 놓치면 1년을 다시 기다렸다.

산양 같은 희귀종들은 비록 동물원에서 스케치하고 사진을 찍었지만, 동물들이 스쳐 지나간 자리를 찾아 분위기를 파악하기도 했다. 직접 보지는 못해도 동물의 발자국 등을 통해 몸으로 익힌 분위기는 동물 그림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새들의 지저귐마저도 몸집 크기를 판단하는 데 적절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화가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쇠똥구리·바구미 같은 곤충들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화가들의 마음이 다급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국에 있는 친인척·친구 들에게 연락해 경북 청도에서 바구미를 ‘공수’해 올 수 있었으나, 쇠똥구리는 실물을 구하지 못해 화가들 스스로 세운 원칙을 깰 수밖에 없었다. 그 원칙이란, 남이 해놓은 표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표본 상태가 아무리 좋아도 세월의 때를 입으면 형태와 색깔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카메라·스케치북·연필을 들고 전국을 누비는 화가들 중에는, 아예 자연 속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이들도 있다. 민물고기와 나무를 주로 그리는 정태련·이제호 씨는 95년과 96년에 가족을 이끌고 춘천과 원주로 이사했다. 자연의 변화를 오래 관찰하고, 무엇보다 자연을 느끼며 그림을 그려야 정확한 그림이 나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화가들은 모기가 날개돋이하는 하는 것을 그리려고 모기 애벌레(장구벌레)를 그릇에 담아 화실에 두었다가 숱하게 뜯기기도 하고, 취재하는 과정에서 어느 일간지 1면에 대서 특필된 산양이 가짜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런 과정 끝에 탄생한 동·식물 그림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화가들의 작업은 지금까지 출판된 동·식물 도감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동안 그린 원화들을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작업을 계속해 가면서 그때그때 성과가 쌓일 때마다 도감을 엮어낼 참이다. 그 성과들이 모이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명실 상부한 동·식물 도감이 탄생할 것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숨 다할 때까지 이 작업하고 싶다”

“일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어린이 도감을 펴냈는데, 아직은 동·식물을 다 보이기에는 양이 부족하다. 우리는 숨이 다할 때까지 이 작업에 매달릴 것이다. 우리가 망하지 않고 계속 버티어 갈 수 있다면 우리가 죽은 뒤에라도 언젠가는 한국의 동·식물을 모두 소개하는 자연 사전을 출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태수씨는 말했다.

도토리기획이 펴낸 어린이용 도감은 일반 단행본과 비슷한 크기여서 화가들이 들인 공을 다 담아내지는 못했다. 외국 도감에 비해 그림 자체는 손색이 없으나, 책 크기 때문에 그림을 축소해 실을 수밖에 없었다. 제작비 부담이 워낙 컸던 탓이다.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교육부 등에 함께 제작하자고 여러 차례 제안했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사전을 편찬한다는 생각으로, 판매에 신경 쓰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이태수씨의 말은 도토리기획 팀 전체의 소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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