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교육] 영재 교육이 유아 망친다
  • 吳允鉉 기자 ()
  • 승인 1996.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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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로 키우자” 부모 욕심에 멍드는 동심…각종 조기 교육 ‘오히려 역효과’
아인슈타인·다윈·마르크스·프로이트· 피아제·에디슨·루스벨트의 공통점은 단 한 가지, 부모에게서 조기 교육이나 천재 교육을 강요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교육학·아동학 관련 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인물의 부모는 대부분 어린 자식에게 그들 자신의 주장을 부과하지 않았다. 어린이가 하는 일을 지지하고 격려하면서 집안의 분위기를 지적으로 만드는 데 애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5월 ‘가정의 달’을 맞고 보내면서도 한국의 부모들은 어린이를 위한 바른 육아 방법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른들의 기준에서 어린이의 지능을 높여준다는 화려한 학습 교재나 놀이 기구를 사주고는 만족해 했다. 5월 들어 ‘흔들리는 초상 맞벌이 부부’ ‘30, 40대 아버지 컴백 홈’ ‘청소년의 왜곡된 성’ 등을 통해 급변하는 시대의 가족 환경을 진단했던 <시사저널>은 이번호에서 최근 범람하고 있는‘영재 상품’들이 효과가 있는지 점검하고, 바람직한 육아 교육법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편집자>


많은 부모들은 이제껏 자신의 자녀를 돋보이는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 천재 교육 같은 ‘세공법’을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보석을 만들기는커녕 아직까지 그 세공법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 같다. <천재는 만들어진다> <당신의 자녀도 천재로 키울 수 있다> <지능개발 120가지 방법> 같은 새로운 세공 기술을 담은 책자가 끊이지 않고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자기 자녀를 보석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버릴 때도 된 것 같은데 부모들은 한결같다. 오히려 그 정도가 심해져 ‘천재 교육은 태아부터’라는 세공법을 믿고 0세 어린이의 뇌까지 연마하려 드는 부모도 생겨났다. 부모들이 보석 만드는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업자들이 날마다 내놓는 그럴 듯한 세공법 때문이다. 업자들이 내놓은 대표적인 세공법은 새로움으로 포장한 육아법(이같은 육아법은 언제나 ‘당신의 아이를 똑똑하게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과 3∼7세 어린이가 쉽게 한글과 숫자를 익힐 수 있게끔 만든 학습지이다.

90년대 들어 등장한 것은 세계적인 음악가 정 트리오를 키워낸 이원숙 여사의 육아법과, 홍정욱군의 어머니가 일궈낸 눈물겨운 교육법이다. 한때는 오른쪽 뇌 개발법과 몬테소리 육아법이 화제가 되었다. 어찌나 유행이었던지 그 교육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태권도장·미술학원 간판에까지 몬테소리를 등장시키는 웃지 못할 일까지 일어났다.

최근 들어서는 ‘시치다 교육법’(아이들은 태어났을 때가 가장 지능이 높기 때문에 그때 많은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법)과 EQ(감성 지수·<시사저널> 제339호 참조)를 높이는 육아법이 등장했다. 그리고 서울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원더랜드·짐댄디·짐보리·플레이타임 같은 놀이 학원과, 3∼7세 어린이를 위한 영어 학원이 성업 중이다.

한글·숫자 깨치는 것은 영재와 무관
문제는 이같은 육아법과 육아 기관들의 교육 프로그램이 과연 그들의 주장처럼 어린이의 지능과 신체 발달에 도움을 주는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유아학자는 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전 한국교육개발원 도덕연구실장 김성봉 박사(유아교육학)는 “조기 교육이 장기적으로 혜택을 가져온다는 증거는 없다. 특정 교육 방법이 유행하는 것은 상술에 따른 것일 때가 많다”라고 말했다.

공동육아연구원 박혜원 간사는 놀이 학원의 교육 효과를 비판했다. 놀이 학원은 놀이를 통해 어린이들의 근육과 지적 발달을 돕고 자신감과 사회성을 키워준다고 내세우지만, 박간사는 그 정도 효과라면 집안 활동으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간사는 “오히려 그런 곳에서 노는 방법을 익힌 아이는 다른 데서 놀 줄 모르고, 자연과 친숙해지는 데 힘들어 한다”라고 말했다. 이원영 교수(중앙대·유아교육)는 놀이 학원의 수업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만 3∼5세 어린이의 주의 집중 시간은 15∼25분밖에 안된다. 그런데도 30~40분씩 수업을 하면 이미 익힌 것까지 흐트러뜨릴 수 있다.”

학습지는 80, 90년대 어린이 교육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 10여 년간 학습지는 사뭇 공격적으로 젊은 어머니를 공략했다. 그 결과 이제 전국의 어린이 치고 학습지 한두 가지 하지 않는 어린이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유아교육학자들은 근본적으로 초등학교 입학 전 어린이에게 그같은 학습지는 필요없다고 단언했다. 이른 나이에 한글이나 숫자를 깨치는 것이 영재로 가는 길이라는 주장은 전혀 확인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살 때 글자나 숫자를 깨친 어린이가 일곱 살에 깨친 어린이보다 정서나 지능이 낫다는 증거도 없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유아교육학자들은 인생의 초기 3, 4년간은 불신감·수치감·회의감보다 강한 신뢰와 자율성을 얻는 시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학습지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자기 안정과 자존심이 생기기 전의 어린이에게 심리적인 위협을 줄 수도 있다는 경고이다. 더구나 잘못했다고 지적하면 어린이에게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안겨줄 수도 있다. 이원영 교수는 “부모가 어린이에게 학습지를 시켜 뭔가 결과를 얻어내려고 하는 것은 부모의 만족을 위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어떤 어머니는 어린이로 하여금 유치원, 미술·영어·영재·수영·피아노·컴퓨터 학원을 한꺼번에 다니도록 하는 ‘학습 고문’도 마다지 않는다.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남이 하니까 안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다른 집 아이보다 뒤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같은 위기감이 결국 어머니들을 과열 경쟁이라는 또 하나의 ‘전쟁’에 뛰어들게 만든다. 전쟁에 기름을 끼얹는 것은 자기 자녀가 특별하거나 우월하기를 바라는 어머니들의 비뚤어진 마음이다. 그러나 그같은 전쟁의 목표는 안쓰럽게도 자녀를 어머니 자신이 우상으로 삼고 있는 인물이나 예능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린이는 자기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를 만족시키기 위해 잘못된 교육에 따라 로봇처럼 움직이며 또 하나의 모방품이 되어 가는 셈이다.

“어린이는 무한한 잠재력 지닌 한 알의 도토리”

왜곡된 자녀 교육을 하는 어머니들을 비판하는 충고가 있다. 93년 영국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인도 출신 교육자이자 생태 운동가인 쿠마르가 한 말이다. “현대의 어머니들은 어린이들을 씨앗으로 여기기보다 텅 빈 물통으로 생각해, 거기에다 온갖 쓰레기와 먼지를 쏟아붓느라 정신이 없다.” 그는 어머니들이 자녀를 하나의 씨앗, 한 알의 도토리로 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어떤 식물학자나 정원사도 그 작은 씨앗 속에, 거대한 참나무로 자라나 수백 년을 살고 수백 만 개의 도토리와 나뭇잎과 줄기를 만들어낼 힘이 들어 있다고 가르치지 못하지만, 어머니인 참나무만은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아 교육은 경주가 아니다. 따라서 결승점이 없다. 어머니는 자신의 자녀에게 또래 어린이들과 어울릴 기회를 제공하고, 독창성과 창조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린이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것이다. 특히 다양한 놀이는 어린이가 자신감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존중해 주는 것이 좋다.

실제 우리 주변에는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소신껏 자녀를 키우는 주부들이 더러 있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조현경씨(33·서울시 용산구)는 다섯 살짜리 아들에게 학습지를 시키지 않을 뿐더러 유치원에도 보내지 않는다. 대신 그는 어린이를 할머니·할아버지랑 놀게 하고, 퇴근 후에는 자신이 직접 지은 동화를 들려주거나 블록 같은 놀이기구를 가지고 함께 논다. 그는 “다른 아이들이 다 읽는 한글과 숫자를 못 읽을 때는 속상하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도덕적 영재가 인정 받는 세상이 오리라고 믿기 때문에 걱정은 없다”라고 말했다.

공동 육아 형태를 띤 ‘어린이집’의 교육 프로그램도 눈에 띈다. 서울에 셋, 과천·청주·대구에 각각 하나씩 있는 어린이집은 공동 육아를 위한 협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유치원이나 놀이방과 달리 조합원이 출자금을 내어 주민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집에서 가르치는 것은 단순 획일적인 교육이 아니라 창의력·탐구심·실험 정신을 높이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짜여 있다(97쪽 상자 기사 참조).

유치원 교사인 이영숙씨(서울 연촌초등학교 병설 유치원)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국·공립 유치원이 그같은 교육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함께 율동하고 노래하는 교육에서 벗어나, 어린이가 각자 좋아하는 놀이 중심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유치원에 가자마자 우선 자신이 그날 무엇을 하고 놀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날의 주제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기를 하거나 놀이를 하면서 창조력을 높인다.

하지만 국·공립 유치원은 학급당 평균 학생 수가 30∼40명이나 되어 교사가 어린이의 특징을 파악하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이교사는 국·공립 유치원이 많이 생겨 3, 4배까지 비싼 사교육비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현대의 부모들은 사회적 압력과 가공할 유혹력을 가진 매스컴의 희생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름 있는 대학을 나와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와, 무차별로 쏟아져 나오는 광고에 현혹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아동학자들은 ‘모든 과외는 성공으로 통한다’는 어머니들의 왜곡된 신념을 지금 당장 바꾸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천천히 전국민적인 운동을 펼쳐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원영 교수는 왜곡된 유아 교육을 개선하려면 좀더 세부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 학생에게도 바른 육아 교육을 가르치고, 텔레비전과 같은 대중 매체가 나서서 육아 캠페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신문과 텔레비전에는 학습지 광고를 절대 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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