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 이동철 (용인대 교수·동양철학) ()
  • 승인 1999.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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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기는 한 인간과 시대를, 나아가 역사를 되살리는 예술 작품이자, 영상 시대 인문학이 나아갈 길을 예시하는 훌륭한 전범이다.”
새천년을 눈앞에 둔 오늘,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로 동서 문명의 상호 이해와 교류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일상 생활에서조차 ‘지구촌’이니 ‘세계화’니 하는 말을 사용하지만, ‘문명 충돌’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의 접촉이 날로 빈번해지는데도 어째서 문명 간의 갈등은 해결되지 못하는 것일까? 문제 해결에는 여러 갈래의 접근이 가능할 것이고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헝클어진 실마리를 풀기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 사태의 발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송영배·정인재·조 광 등 여러 교수의 번역으로 <천주실의>(서울대학교)가 출간된 것도, 조너선 D. 스펜스의 명저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이 주원준의 뛰어난 번역으로 소개된 일도 이런 흐름의 하나일 것이다.

마르코 폴로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출신인 마테오 리치는 종교 개혁에 대항하면서 동양 선교에 선도적 역할을 한 예수회 회원이었다. 16세기 후반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그는, 이질적 문화 풍토에서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세계 지리를 중국에 소개하면서 서양 문명의 우수성을 입증하고자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중국 문명의 특성을 존중했다.

방대한 사료와 독특한 방법론 압권

동서 문명 교류에서 차지하는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주목된 인물이다. 80년대 이전 서양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친중국적이면서 책략이 풍부한 선교사이자 서양적 관념을 전파한 사람이라는 측면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후 동서의 문화 교류를 반성하고 양자 사이의 장벽과 장애를 검토하며 리치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업적이 제르네의 <중국과 기독교>, <천주실의> 영역본, 스펜스의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등이다. 스펜스는 이 책에서 특히 종래 간과되었던 중국 문명에 대한 리치의 비우호적 태도를 조명했다.

이미 <왕여인의 죽음>(이화여대·95년), <현대 중국을 찾아서>(이산·98년), <천안문>(이산·99년)을 통해 한국 독자와도 상당히 익숙해진 저자는 영미권을 대표하는 중국 사학자이다. 짙은 문학적 향기를 지닌 전기의 양식으로 역사의 장면 속에서 딜레마에 빠진 주인공의 복잡한 심리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그의 일관된 스타일이다. <왕여인의 죽음>과 함께 이 책이 박식한 문학 비평가 해럴드 블룸에 의해 ‘서양의 정전(正典)’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제목에 사용된 ‘기억의 궁전’이란 대다수 독자에게 생소한 용어일 것이다. 그것은 16세기 예수회에서 유행했던 기억술의 한 방법이다. 그것은 기억과 상상으로 궁전을 만들어, 그곳에 특정한 개념의 조합을 대표하는 영상을 안치하는 것이다. 지식의 세부를 기억할 필요 없이, 궁전에서의 위치만 기억하면 된다. 그 위치에 도달하면, 그 영상과 연관된 개념들을 상기하게 된다. 리치는 기억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중국의 사대부를 위해 <기법(記法)>이라는 책을 쓴 바 있다.

스펜스는 리치가 <기법>에 사용한 한자 무(武)·요(要)·이(利)·호(好)의 이미지와 출판업자 청다웨(程大約)의 서화집 <정씨묵원(程氏墨苑)>을 위해 선택한 그림을 이용해 그의 심리 세계를 재현했다. 매우 독특한 구성과 전개를 보여주는 이 책에서 스펜스는 이미지와 그림을 통해, 한 개인의 생애라는 전기의 제한을 벗어나 지역과 국가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당시의 서양과 중국 사회를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무’를 통해서는 16세기의 종교 전쟁과 임진왜란이라는 시대 배경을, <파도에 빠진 사도>의 그림에서는 리치의 해상 여행과 시련을 서술했다.

방대한 사료와 독특한 방법론이 구사된 이 전기는 한 인간과 시대를, 나아가 역사를 기억의 궁전에서 되살리는 뛰어난 예술 작품이면서 동시에 영상 시대의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예시하는 훌륭한 전범이다. 당시의 중국을 다룬 또 다른 명저인 레이 황의 <1587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가지 않은 길·97년)를 함께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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