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음악]''댄스 음악''에 무너지는 성인 음악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5.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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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자극의 댄스곡, ‘중심 음악’ 지위 굳혀…성인 위한 음악 궤멸
가장 최근에 나온 신세대·구세대 구분법. ‘그룹 룰라의 남자 멤버들 이름을 아는가’. 이른바 구세대는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를 따라 부르는 것을 포기했다. ‘랩’ 혹은 ‘테크노’를 표방하는 노래들의 빠른 템포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룰라의 음악은 구세대로 분류되는 이들에게는 음악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여자 멤버들의 시각적인 요소로 크게 호소했다. 따라서 룰라의 음악보다는 ‘섹시한 춤’을 추는 김지현과 채리나만 크게 보일 뿐이다.

80년대만 해도 기성세대는 이문세나 변진섭의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었다. 10대 혹은 젊은이들이 대중 음악 수용을 주도한다 하더라도, 기성세대는 그 음악에 대해 좋다 나쁘다를 판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치 기준은 가질 수 있었다.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대중 음악을 지배한 것은 멜로디, 곧 선율이었다.

대중음악계에서는 한국 대중 음악의 물길을 돌려버린 ‘서태지 신드롬’을 이제는 ‘서태지 혁명’이라 부른다. 95년 한국 대중 음악의 지형도를 보면, 서태지는 결과적으로 혁명을 일으켰다. 대중음악사에서 변방의 위치를 차지하던 댄스 음악이 확고한 주류 음악으로 진입하는 데 물꼬를 텄기 때문이다.

멜로디보다 리듬, 메시지보다 이미지

93년 말 김건모라는 탁월한 보컬의 소유자가 나타나면서부터 댄스 음악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주류 음악의 지위에 올라섰다. 올 상반기만 하더라도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에 이어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 노이즈의 <상상 속의 너>, 디제이덕의 <머피의 법칙>, 알이에프의 <이별 공식>을 거쳐 지금은 박미경의 <이브의 경고>가 ‘정글’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그 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이승환·윤종신이 <천일 동안>과 <부디>로 여기에 대항하고 있지만, 발라드 장르의 두 가수는 자기들이 지녀온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을 뿐 댄스 음악의 열풍를 잠 재우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보인다.

올 상반기 브루스 스프링스턴, 스티비 원더, 이글스 등 70~80년대를 풍미한 가수(그룹)들이 미국의 대중음악계에 당당하게 진입해 음반 판매량과 각종 차트의 상위권을 차지한 것과는 반대로, 한국의 노장들은 95년 상반기에 단 한 사람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추신>을 낸 김창완도, <내 나이 마흔 살에는>을 낸 양희은도 2만장 안팎의 앨범 판매량만을 기록했으며, 이문세·이치현·유익종 같은 중견 가수들도 대중 음악 시장에서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
중견들의 참패와는 반대로 김건모·룰라로 대표되는 댄스 음악 가수들은 선배 가수들의 백배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신·구 세대의 싸움은 대중 음악의 양대 기둥을 이루는 ‘멜로디’와 ‘리듬’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리듬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리듬과 비트를 앞세우는 댄스 음악이 대세를 장악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중 음악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10대들의 장악력이 날이 갈수록 커지기 때문이다.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80년 전후에 태어난 10대가 이전 세대와 갖는 가장 큰 차별성은 대중 음악에서 메시지보다 이미지를 더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10대는 화려한 춤을 동반하는 댄스 음악의 볼거리에 열광하고, 빠른 리듬과 박자, 그로 인한 속도감을 즐긴다.

드럼의 강한 비트와 빠른 속도는 90년대 10대들이 열광하는 농구와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쉴새없이 골이 터지는 빠른 속도와 화려한 육체적 기술을 유연하게 구사하는 마이클 조단에 열광하는 10대의 성향이 대중 음악 선호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문학 평론가 이동연씨(<문화과학> 편집위원·중앙대 강사)는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서양 음식을 먹고 자란 10대의 육체적 조건이 감성의 변화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라고 분석한다. 곧 한국의 기성세대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젊은 세대의 육체적 조건이 격렬한 몸놀림을 동반하는 대중 음악의 경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팝 칼럼니스트 임진모씨에 따르면, 댄스 음악은 대중 음악 장르가 탄생한 이래 언제나 존재해 왔다. 댄스 음악은 기본적으로 젊은이들의 발랄한 성향과 욕구를 반영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70년대 미국 포크 음악의 기수 봅 딜런이 록 음악을 도입해 포크록으로 나아간 데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청년 문화를 주도하고 젊은이들의 몸짓을 반영하는 데, 젊은 지성을 대변하는 포크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 임씨의 해석이다.

한국에서 지금 주류를 이루고 있는 댄스 음악은 모두 흑인 음악에서 나왔다. 서양 대중 음악의 뿌리가 흑인 음악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랩·레게·테크노·하우스·레이브·정글로 이어지는 수많은 댄스 음악 장르들은 강한 비트와 빠른 속도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흑인 음악에서 파생한 것들이다. 서양의 흑인 댄스 음악은 시차 없이 바로 수입된다. 최근 유럽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정글’도 가수 박미경의 <이브의 경고>를 통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정글 음악의 뿌리는 ‘하우스’라 불리는 댄스 음악이다(75쪽 도표 참조). 프로듀서들이 집에다 미니 스튜디오를 꾸미고, 신시사이저와 컴퓨터를 이용해 음악을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하우스 음악은, 80년대 중반 이후 수많은 형태로 분화해 왔다. 최근 한국의 댄스 음악 음반에서도 하우스의 분화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딥 하우스(Deep House)’니 ‘유로(Euro) 하우스’니 하는 세분화한 장르들이 퍼져나가는가 하면, 최근 한국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테크노’와 ‘레이브’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가장 마지막 형태가 ‘정글’이다.
‘음악 편식’ 심각한 상황

경제 용어인 포스트포디즘(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설명될 수 있는 댄스 음악의 분화는 곧 속도의 빠름과 비트의 강화로 나아간다. ‘오래된 좋은 것보다 나쁘더라도 새로운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는 속도와 비트를 통해 더욱 강렬해지는 자극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최근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 못가요>라는 10대 노래집을 펴낸 배화여고 최재식 교사(95쪽 ‘사람과 사람’ 참조)는 ‘청소년들이 한국 대중 음악에서 어떤 요소들을 선호하는가’를 설문 조사한 적이 있다. 이 조사에서 청소년들은 리듬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고, 그 다음은 멜로디, 춤, 가사 순이었다. 10대들은 몸을 저절로 움직이게 하는 리듬에 가장 큰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댄스 음악 열풍을 일으킨 수용자들의 소비 형태 변화는 ‘노래’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노래는 ‘함께 논다’는 본래의 의미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공동체보다는 개성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90년대 대중 음악의 주 수용자들에게는 ‘함께 부르는 노래’보다는 개성을 확실하게 드러나게 해주는 노래가 훨씬 더 중요하다. 최교사는 “청소년들은 함께 노래 부르기보다는 합창이 불가능한 댄스 음악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수학여행이나 소풍의 풍속도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지금은 댄스 음악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가 없으면 놀이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대중 음악 수용자들의 리듬 선호는 음반 제작자들의 제작 경향과 맞물려 돌아간다. 서태지에게서 댄스 음악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김건모에게서 그 폭발력을 본 제작자들은 성공 확률이 가장 높고, 반응이 빠르고, 한번 히트했다 하면 큰 돈을 거머쥘 수 있는 댄스 음악 쪽으로 제작 방향을 고정해 놓고 있다.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10대 수용자들이 댄스 음악을 선호하므로 제작자들은 상대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댄스 음악 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매우 강한 비트와 속도 경쟁을 하는 듯이 보이는 한국의 댄스 음악은 10대들의 경향을 그 안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흑인 음악이 영향을 미친 ‘검은 피부’에 대한 신세대의 선호는 ‘흰 피부’를 좋아했던 기성세대와는 다른 그들의 성향인 것이다. 대중 음악을 뒤덮고 있는 댄스 음악은, 따라서 기성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음악일 뿐 음악 자체로는 문제가 있을 수 없다. 댄스 음악의 열풍이 보이는 문제점은 오히려 다른 데 있다. 문제는 ‘음악의 편식 현상’, 곧 중견 가수들이 ‘성인을 위한 음악’(AC)을 내놓아도 미동도 하지 않는 한국 대중 음악 시장의 풍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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