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정책]새 정부의 신기루 “21세기 문화 선진국”
  • 成宇濟·魯順同 기자 ()
  • 승인 1998.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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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정책은 뒷전, 돈벌이 궁리” 비판 거세
“우리는 민족 문화의 세계화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전통 문화에 담겨 있는 높은 문화적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겠습니다. 문화산업은 21세기의 기간 산업입니다. 관광산업·회의체산업·영상산업·문화적 특산품 등 무한한 시장이 기다리고 있는 부의 보고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힌 문화 관련 내용이다. 새 정부에 대한 문화예술계의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 김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가운데 문화적 소양이 가장 깊다고 알려졌고, 지난 정권들에서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문화 정책이 새 정부에서 수립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취임사를 들으며 새 정부 출범을 지켜본 문화예술인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문화계가 환영했던 ‘문화부 독립’ 공약이, 야당의 주장 때문이라고는 하지만,‘문화관광부’로 슬그머니 바뀌었고, 문화관광부 개편마저도 민족 문화의 세계화에 역행하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우선 문화관광부 개편안에 들어 있는 소속 기관별 감축 계획안부터 문제를 안고 있다. 전체 인원 2천4백81명 가운데 4백96명을 줄인다는 계획인데, 감축 인원 중 본부 직원은 10명뿐이고 나머지는 문화재 및 도서관 관련 기구와 전문 인력이다. 그 중에서도 관계자들이 ‘문화 죽이기’라며 반발하고 있는 것은 9개 국립 지방 박물관에 대한 지원과 관리 기능을 99년에 지방자치단체에 이관한다는 계획이다.

지방 국립 박물관들을 지방자치단체에 이관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문화재위원회와 한국고고학회·한국박물관협회·한국선사고고학회 등 13개 관련 학회는 성명서를 내고 즉각 철회를 주장하고 나섰다. 지방 국립 박물관들이 처한 현실과 그 역할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라는 비판이었다. 13개 학회를 대표해 성명서를 발표한 한국선사고고학회 임효재 회장은 성명서에서‘경제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국립 박물관을 지방자치단체로 이양하게 되면 박물관 관련 사업은 지방의 경제 위주 현안 사업에 밀려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민족 문화 유산 보존이라는 국민 정부의 21세기 문화 정책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해당 박물관 관계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절박하다. 국립경주박물관 강우방 관장은 “선진국처럼 중앙과 지방의 문화 격차가 크지 않고 예산도 지방자치단체가 마련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강관장이 가장 염려하는 부분도 개발 논리에 밀려 매장 문화재가 무자비하게 파괴될 것이라는 점이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다음부터 국토가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형편에 지방 국립 박물관을 지방자치단체에 이관한다는 것은 문화재 정책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문화재 파괴 조장하는 박물관 정책

국립 박물관들은 그동안 문화재를 파괴해 가며 지역 개발에 몰두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지금도 견제 기능이 힘을 잃어 가고 있어 매장 문화재 관리가 뿌리째 흔들리는 실정이다. 도로·철도·공장 건설 등 중앙 정부에 의해서 무차별적 파괴가 진행되는 마당에, 국립 박물관이 지방자치단체의 산하 단체가 된다면 박물관들이 수행해 온 견제 역할마저도 불가능해진다. 미술 평론가 최석태씨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신대륙이라면 모를까 전국토가 박물관인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립 박물관들이야말로 국가의 기간 시설이다. 국립 박물관들을 지방자치단체로 이관한다는 것은 국토를 그냥 뭉개 버리자는 얘기와 다름없다”라고 지적했다.

매장 문화재 파괴를 비롯해 우려되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재정 문제와 국보급 유물 보관 문제는 둘째로 친다 하더라도, 상설 전시와 특별전 개최가 당장 불가능해진다. 현재 각 지역 국립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의 대다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물을 대여한 것인데, 개편이 이루어진다면 해당 유물을 모두 중앙으로 반환해야 한다. 상설 전시는 물론이고,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전국에서 유물을 모아 전시하는 각종 특별전도 열기 어렵다.

박물관의 ‘두뇌’인 학예연구실 운영도 불가능하다. 현재 학예연구관은 한 박물관에 많아야 7∼8명이어서 수가 절대 부족한 상황인데, 한 지역에 고립된 채 시·도의 간섭과 지시를 받으며 지역 박물관에 남을 학예연구관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국립전주박물관 이종철 관장은 “울주군에 있는 원자력발전소를 울주군에서 사람을 뽑아 운영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소뿔을 자르려다 소 죽이는 일을 하고 있으니 답답하다”라고 말했다.

지방 국립 박물관들을 지방자치단체에 이관한다고 결정한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회(정개위)는 지방 국립 박물관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개위에 참여한 한 실행위원은 “작은 정부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내린 결론이었다. 큰 가닥만 제시했을 뿐 세부 사항을 모두 검토할 수는 없었다”라고 고백했다.

“문화의 기초 튼튼해야 산업화 가능”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이 정책 결정을 하는 바람에 문화가 자꾸 사각 지대가 되어 버린다. 문화 부문의 힘이 약하다고 조직 개편을 할 때마다 자꾸 손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라는 강우방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의 지적은 비단 박물관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21세기에는 한국을 문화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새 정부가 그에 걸맞는 문화 정책을 수립할 의지를 보이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실행할 문화관광부 개편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화관광부의 기구는 1차관보 3실 6관 6국 6담당관 31과에서 실이 1개, 관과 과가 각각 2개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 대상을 선정하는 데 선후와 경중을 따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문화관광부 내부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1개 과 정도면 충분한 종무실은 종교계의 반발을 염려한 탓인지 3개 과에 1급 실장과 3급 종무관을 2명씩이나 둔 기존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국립 박물관·국립 극장·칠백의총관리소 같은 조직을 떼어낸 근거도 뚜렷하지 않다.

더욱 큰 문제점은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21세기에 대비하는 문화 정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도정일 교수(경희대·문학평론가)는 “새 정부도 과거 정부와 마찬가지로 문화 정책이 왜 필요하고 중요한가에 대한 인식이 없다. 정책 담당자들이 문화를 새롭게 본다고 말은 하지만 앞선 정권 관리들도 그렇게 말했다. 문화가 중요하다고 말할 때 그 인식 수준은 문화 상품을 팔아먹자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도교수에 따르면, 문화의 중요성은 고부가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산업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금 한국에 진정으로 필요한 문화 정책 탐구가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새 정권의 최대 과제가 경제적 도전이 아니라 사회적 도전이라고 보는 도교수는, 경제 위기를 가져온 갖가지 구습을 타파하는 민주주의 환경 조성을 위한 문화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본질적으로 썩은 사회를 만들어 왔던 것, 진실이 머리를 둘 곳이 없는 사회, 부패의 문화적 뿌리를 먼저 살펴야 한다. 경제 위기를 가져온 재벌들의 세습주의·가부장주의 등 여러 봉건적인 문화 관습들, 문화의 비이성성을 뜯어고치는 사회 개혁이 필요하다. 5년 안에 이루기는 힘들겠지만 사회 개조를 위한 기틀과 방향은 잡아야 한다.”

문화산업은 말 그대로 산업이어서 장기적인 안목과 기초 분야에 대한 투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영역이다. 지난 정권이 그랬듯이, 고부가가치라는 결과물과 외피만 보아서는 어떤 성과도 얻을 수 없다. 지난 1월 ‘문화 정책은 왜 필요한가’라는 토론회를 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의 박인배 실장은 문화를 장식적인 의미로만 파악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산업에 앞서 문화부터 복구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문학·음악·미술·연극 등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우고 국민의 문화 수준을 전반적으로 높이는 기초 분야에 대한 정책이 올바로 수립되지 않고서는 문화산업을 이야기할 수 없다. 국민의 문화 의식이 고양되고 기초 분야가 제대로 다져져야 산업이든 관광이든 가능하다. 이것은 국가 지도 이념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새 정부는 정부 조직 개편에서도, 해당 부의 명칭을 결정하는 데서도 문화를‘다른 부문의 들러리’정도로 인식하는 태도를 보였다.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문화’는 안중에 없고 ‘산업’에만 욕심을 내는, 지난 정권의 우를 되풀이하려는 조짐이 나타나는 것이다. 문화예술계의 우려가 예사로운 것은 아니다. 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50년에 걸친 ‘인식 마비 전통’이 50년 만에 정권 교체를 한 새 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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