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화]<태백산맥> 문화 공원 설립 백지화
  • 광주·羅權一 주재기자 ()
  • 승인 1997.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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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빨치산 미화’ 시비 휘말려 6개월 만에 준비팀 해체
80년대의 최고 베스트 셀러 소설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인 보성군 벌교읍 일대를 테마 공원으로 조성하려던 사업이 ‘빨치산 미화’ 라는 해묵은 시비에 휘말려 사실상 무산되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현재까지 4백50만 부가 팔린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인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는 포구를 가로지르는 벌교 홍교와 소화다리, 고뇌하는 지식인 김범우의 집, 현부자네 집, 무당 소화의 집터, 그리고 토벌대장 임만수가 기거하던 남도여관과 혁명가 염상진이 주민을 모아 놓고 연설했던 벌교 남 초등학교 운동장, 금융조합 건물 등 소설에 묘사된 당시의 현장들이 열 군데 넘게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벌교 지역은 매년 수천 명에 이르는 문학인과 대학생 들이 찾아오는 문학 답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보성군(군수 문광웅)은 이러한 <태백산맥>의 주요 현장을 보전 또는 복원해 ‘문학 공원’이라는 문화 상품으로 조성키로 하고 지난 3월 ‘소설 <태백산맥> 테마 공원 조성팀’을 구성했다. 홍교 초등학교 폐교 부지를 사들여 문화체육센터를 겸한 전시관을 만들고 문학 지도와 기행 안내 책자를 제작하며, 주요 현장에 안내 표지판을 세워 소설의 감동을 관광객들이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다가 보성군은 <태백산맥>과 관련한 ‘이적성’논란을 우려한 지역 보수 단체들의 반대와 지역 여론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워 최근 팀을 해체했다. 이와 관련해, 보성 지역에는 ‘테마 공원 추진팀 관계자가 정보기관에 불려가 시달림을 당했다’ ‘우익 단체들의 색깔론 시비를 우려해 포기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보성군은 이러한 소문과 색깔론 시비 자체를 전면 부인했다. 테마 공원 조성팀장을 맡았던 보성군 조동환 문화공보실장은 ‘사업을 추진하다가 중단한 것이 아니라 구상 단계에서 예산이 부족해 답보 상태에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폐교 부지를 사들여 기념관 부지로 활용하려 했으나 확보한 예산은 2억원인데 부지 감정가가 6억2천만원에 달해 매입을 사실상 포기했고, 테마 공원 조성과 관련해 주민들과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실패해 당분간 중단키로 했다는 것이다.

한국자유총연맹 보성군지부장 조일환씨는 “관련 단체와 지역 유지들이 협의해 군수에게 계획을 포기하도록 건의한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순수한 뜻으로 추진한다 해도 빨치산 미화 소설이라는 논란이 큰 마당에 자칫 이데올로기 시비에 휘말릴 소지가 크다고 판단했다. 사업 중단이 아니라 아예 취소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실제 벌교 지역 주민들은 테마 공원 조성에 찬성하는 여론이 더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방문객들이 벌교를 찾을 때마다 안내를 맡곤 한다는 벌교읍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벌교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테마 공원 사업이 중단된 것이 매우 안타깝다. 이제 방문객을 안내할 의욕조차 뚝 떨어져 버렸다”라며 보성군이 사업을 포기한 것을 허탈해 했다.

한국 현대 소설을 연구해온 임환모 교수(전남대·국문학)는 ‘문학적 허구성과 역사적 사실을 동일시하는 데서 오는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임교수는 특히 “<태백산맥> 제1부 ‘한의 모닥불’은 벌교 주민의 생활사이자 이데올로기 갈등에서 빚어진 민중의 애환사로서 소설의 압권이다. 오히려 사상 문제를 탓하려면 빨치산 투쟁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3,4부가 논쟁거리가 됐으면 됐지 벌교를 무대로 한 1,2부에는 논란거리가 없다고 본다”라고 밝혔다. 작가 조정래씨는 ‘소설에 대한 시비까지는 감수하겠으나 자치단체가 나서서 벌이는 문화사업마저 반대하는 것은 반문화적인 행위’라며 크게 낙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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