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도선국사 · 왕인 유적 공방 가열
  • 羅權一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1997.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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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불교계·주민 “왕인 유적 상당수 도선국사 것” 주장…영암군 ‘절충안’ 마련
국립 공원 월출산이 자리잡고 있는 전남 영암군은 선사 시대부터 영산강 유역을 따라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운 고장이다. 영암 지역은 특히 고대 일본에 <천자문> <논어>와 도자기 등 문물을 전한 왕인(王仁·AD 366~418년 추정)과 풍수학의 시조인 도선(道詵·AD 827~898년)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에는 왕인을 기념해 조성한 전라남도기념물 제 20호 ‘왕인 박사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86년 완공된 이 유적지에는 왕인묘와 전시관, 왕인 생가터 등이 조성되어 매년 20만명에 이르는 탐방객이 찾는다. 왕인을 ‘일본 문화의 은인’이라고 떠받드는 일본인들도 매년 참배단을 구성해 유적지를 찾는다.

그러나 정작 군서면 구림 지역의 일부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왕인 유적으로 알려진 것들이 상당 부분 도선국사 유적과 전설을 도용한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유적들은 두 인물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는 구림 지역의 성기동(聖基洞. 성짓골로도 불린다) 성천(聖川 또는 聖泉)을 비롯해 문산재와 양사재, 왕인석상, 상대포, 백의암 등이다. 이 유적들을 둘러싸고 영암군과 학계가 왕인만을 강조하고 도선국사 전설은 제외해 버렸다는 주민들의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왕인 유적지 인근에 위치한 성천은 애초에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가 깃든 곳으로 알려져 왔다. 주민들이 알고 있는 전설에 따르면, 마을 처녀가 성천 냇가에서 빨래하다 떠내려 오는 푸른 오이를 먹고 낳은 아이가 도선이라는 것.

두 사람 모두 같은 곳에서 태어났을 수도

그러나 50년대 성천 인근에서 성천(聖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학계와 일부 주민들은 왕인 탄생 전설을 뒷받침하는 유적으로 간주했다. 예로부터 왕인이 성기동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었고, 성(聖)이라는 글자가 불교보다는 유학계의 거두, 즉 성인에 이를 만큼 큰 학자를 뜻하는 표현이므로 왕인 유적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이러한 논란과 관련해 김희규 영암문화원장은 “도선국사는 왕인보다 4백60여년 뒤에 태어난 사람이다. 성기동이 유서 깊은 고장인 만큼 두 인물이 모두 구림의 성기동이라는 명촌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월출산 기슭인 도갑리 산 33번지에 위치한 문산재(文山齋)와 양사재(養士齋) 역시 논란이 가시지 않고 있는 유적이다. 학계와 영암군은 문산재와 양사재를 왕인의 수학처(修學處)이자 후학을 양성했던 곳으로 간주하고, 이런 내용을 담은 안내 표지판도 세웠다. 그러나 불자와 주민 들은 문산재가 왕인과 관계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며, 옛날부터 ‘문산재’라기보다는 ‘문수암’이라고 불러 왔기 때문에 도갑사와 관련된 암자였거나 도선국사가 세운 암자라고 말한다.

문산재 부근에 소재한, 고려시대 석상으로 추정되는 왕인 석상(王仁石像)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영암군은 이 석상에 새겨진 인물이 도포자락에 두 손을 넣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다 불상에는 으레 있기 마련인 ‘백호’(부처님 이마의 하얀 점)가 없기 때문에 불상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아울러 왕인이 수학했던 문산재 부근에 있어 후학들이 대유학자인 왕인을 기려 조각한 것으로 본다. 이에 반해 주민 김찬모씨(63)는 “암자 옆에 있는 석상을 일방적으로 왕인석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수보살이나 관음보살 부처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주장했다.

영암군과 주민들 간의 이러한 논란은 하나의 유적을 놓고 왕인과 도선이라는 두 인물의 전설이 혼재되어 있는 사실을 무시하고 영암군이 주민들의 양해 없이 일방으로 왕인 현창 사업만 벌인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지역 문화계 인사들의 중론이다. 엇갈린 주장이 있는데도 영암군이 왕인 박사 전설의 합리성만 따져 상대적으로 도선국사를 기념하는 사업을 소홀히 한 반면, 왕인 현창 사업만 성대하게 추진해 지역 불교계와 주민들의 반발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향토 사학자 김정호씨(영산호 농업박물관장)는 “구림 지역 전설을 중심으로 그 합리성을 따진다면 왕인 전설이 합리적이고 우위에 있다. 왕인이 영암 출신이라 하더라도 철천지 원수 같은 일본에 은혜를 끼친 인물이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도선은 전통적으로 민간 신앙화한 풍수설의 종주로 추앙받아온 탓에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거나 신비화한 인물이다”라고 주장한다.

도갑사에 도선국사 기념관 건립 예정

반면 도갑사 주지 범각 스님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격이다. 난데없이 왕인이 부활해 도선국사와 연관 있는 전설과 유적까지 모두 왕인의 유적으로 바뀌어 버렸다. 도선국사를 배제하고 월출산과 구림 지역의 유적을 말할 수는 없다”라고 못박았다. 범각 스님을 비롯한 불교계와 지역 주민들은 최근 영암군의 지나친 왕인 현창 사업에 반기를 들고 도선국사를 재조명하는 학술 세미나를 열어 왜곡된 진실을 밝히고야 말겠다는 입장이다.

영암군(군수 박일재)은 지역 주민과 불교계의 이러한 요구를 반영해 왕인 전설과 도선 전설이 혼재된 유적은 안내판에 내용을 기록하고, 도선국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도갑사 경내에 ‘도선국사 기념관’을 설립할 예정이다. 아울러 덧붙여지고 과장된 도선 전설을 주민들이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주민 설득 작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현재의 왕인 유적지를 국가 사적지로 지정하도록 정부에 건의할 방침이다.

박정웅 영암군 문화재전문위원은 “영암에서 위대한 인물들이 탄생했다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다. 왕인은 왕인대로, 도선국사는 도선국사대로 인정해야 한다. 왕인과 도선국사 탄생설을 전설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사와 생활상을 알 수 있도록 성기동 지역의 유적을 발굴 조사해 당시 두 인물이 태어났을 만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지춘상 교수(전남대·국문과)는 “구림 지역의 왕인·도선국사 설화는 비슷한 전설을 놓고 서로 견강부회하는 경향이 짙다. 민담형태론과 같은 구비문학 전문가들의 연구를 통해 문제가 다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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