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현실] 고개 숙인 남자, 설땅이 없다
  • 吳允鉉 기자 ()
  • 승인 1996.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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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정 이중고에 숨막히는 남성들…“새로운 남성상 모색” 남성학 각광
오성전자 신제품 개발부 안성기 과장은 설사가 잦다.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상사의 닥달과 승진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부장은 틈만 나면 승진을 미끼로 그를 유혹하거나 위협한다. 그때마다 그의 허리는 직각으로 꺾이고 목소리는 모기 소리만해진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일탈과 자유를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는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가끔 비를 맞으며 느껍게 우는 일뿐이다.

최종원 대리는 10년째 대리 직을 ‘고수’하고 있는 무능력자이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낙천성과 소탈함으로 하루하루 어려움을 극복해 나간다. 그에게는 다른 시련이 있다. 아내가 업무와 부부 관계에 무능하다며 그를 노골적으로 ‘학대’하는 것이다. 그에게 사는 즐거움은 없다. 있다면 후배를 등쳐서 술 얻어 먹을 때뿐이다.

안과장과 최대리는 영화 <남자는 괴로워>(이명세 감독)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다. 이 영화는 오늘의 직장 남성들이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새끼들을 위해’ 회사 안에서 얼마나 비굴하고 비참하게 부대끼고 있는지를 그린다. 그리고 오늘의 남성성이 어떻게 무너져내리고 있는지 적절히 보여준다. 남성성이 무너지는 것은 비단 영화 안에서 뿐만이 아니다. 우리 이웃·사회·국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반 현상이다.

그 기점은 산업화가 가속화하던 50, 60년대로 거슬러올라간다. 크고 작은 기업이 생겨나면서 ‘남자란 입신양명하여 가문을 빛내고,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권위주의적 문화 풍토 안에서 자라난 대부분의 한국 남성들은 봉급자로 전락했다. 그들은 회사의 ‘부속품’이 되어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을 하느라 자신들의 전통적 가치를 강조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자그마한 권력이라도 잡기 위해 남성성(자신만만하고 용기있고 완전한 성)을 버리기 시작했다. 윗사람에게 드러내놓고 아부하지 않고는 미래에 대한 어떤 보장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남성성을 벼랑으로 내몬 것은 페미니스트(여성해방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여성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남성성을 분석하고 공격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남성성은 빛나고 자연스러운 존재였지만, 그들의 철저한 연구와 공격으로 벌거벗은 임금님 꼴이 되었다. 수천 년간 갑옷 노릇을 해온 남성성의 ‘권위’는 생살이 드러날 정도로 상처를 입었다. 남성들은 남성성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카우보이와 타잔·람보·터미네이터 같은 새로운 영웅들을 등장시켰다. 결코 여성에게 정복되지 않고 여성을 보호하는 이런 인물들을 통해 여전히 남성성의 신화가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지만 그것조차 허구성의 바닥이 드러나자 아무도 더 이상 남성성이 강인한 성이라 믿지 않게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성은 남성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라고 치부하기까지 하였다.

남성 중심 문화로 오히려 손해본 남성

엄밀히 따지면 남성 역시 신화 같은 남성성의 피해자였다. 갓난아기 때부터 ‘사내 녀석이 울기는…’ ‘남자가 그깟 일에…’ ‘사내라면 모름지기…’ 라는 교육을 통해 더 강하고 용감하고 명석하게 보이도록 길들여졌던 것이다. 그리고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한 척하도록 지도 받았던 것이다.

산업화 이후 그같이 왜곡되고 강요된 남성성은 ‘부메랑’이 되어 남성들을 강타했다. 한국의 가부장 제도 아래서 아버지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가족을 부양하는 대신, 내놓고 여성들을 억압·착취할 수 있었다. 반면 현대의 아버지는 가족 부양을 떠맡기는 했지만 권위와 특권을 잃었다. 페미니스트들과 매스컴의 위력 때문이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돈을 위한 고된 일과 ‘가장’이라는 벗기 어려운 짐뿐이다.
이제 남성들은 남성성이 더 이상 강인한 성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리고 의학적으로 자궁 내에서 더 많이 자연 유산되는 것이 남자 아이이고, 어린이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정신 장애도 남자 아이에게 더 많고, 더 오래 사는 것이 여성이라는 이유를 들어 남성성이 여성성보다 더 나약한 존재라고 고백한다.

불과 20, 30년 전만 해도 이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남성성에 대해 누구도 함부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설사 이의가 있더라도, 페미니즘이 조화로운 대립을 와해시키고 안정된 가정을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비난을 퍼부으며 일축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제 대세는 낡은 남성성은 죽어가고 있고, 우리의 눈앞에는 아직 윤곽은 희미하지만 새로운 남성성이 걸어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해 5월 출범한 한국남성연구회(회장 정채기)는 그같은 새 남성성을 맞아들이기 위해 조직된 연구 단체이다. 정채기 박사(35·교육학)는 “남성연구회는 이 사회에서 남성이기 때문에 보는 피해와, 남성 중심 사회의 각종 편견과 고정 관념에서 나오는 부산물에 주목한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남성학은 지금까지 개인과 집단 차원에서 남성에게 지워졌던 남성다움의 굴레를 벗겨 남성으로 하여금 참된 자아를 찾도록 연구 교육하는 학문이다.

남성해방운동이 처음 전개된 것은 70년대 초 미국에서였다. 급진적이고 격렬한 페미니즘을 겪으면서 몇몇 남성 학자들이 남성성을 잃게 된 역사적·심리적 원인들을 규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남성해방운동의 자장이 넓어지고, 84년 남성학 강좌가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에 처음 개설되었을 때 페미니스트들은 상당한 우려를 표명했다. 혹시 여성학에 맞서 공포나 위협, 정치적 문제로 비화하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이 걱정은 기우였다. “남성학이 여성학에 맞서 남성을 옹호하는 학문이 아니라 여성학과 연계해 남성의 모든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정박사는 말했다.

남성학의 관점에서 한국의 남성들은 어느 나라 남성보다 피해가 크다. 아직도 가장이 가족의 모든 문제를 도맡아 해결하게끔 되어 있고, 남성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까닭이다. 더 불행한 것은, 자신이 왜 그것을 떠맡아야 하는지도 생각지 않고 앞만 보고 뛰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성 속의 여성성 주저없이 드러내야”

일부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의 모임’ ‘가족회의를 실천하는 아버지들의 모임’ ‘자녀 사랑을 실천하는 아버지들의 모임’ 같은 단체가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들의 관심과 역할은 남성성이 아니라 ‘아버지’에 국한한 면이 없지 않다. 2백50여 남성해방운동 조직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미국에 비하면 아직 이 땅의 남성학은 ‘태아’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정채기 박사는, 21세기에는 신축성 있고 가역성 있는 새로운 남성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존 남성성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신화 속의 헤르마프로디토스(양성 神)처럼 양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페미니스트 사회학자인 엘리자베트 바뎅테는 를 통해 ‘필요하다면 현대 남성들은 여성만큼 훌륭하게 아이를 돌볼 수 있다. 자신의 잠재된 여성성을 발휘할 때면 아버지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민감하고 다정다감하며 능숙한 보조자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여성에게 남성 호르몬이 있고 남성에게 여성 호르몬이 있듯이 남성성이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성이 치부처럼 여기면서 숨기고 억압해온 자신의 여성성의 문을 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남성연구회는 그와 같은 관점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에 접근할 계획이다. 정채기 박사는 21세기의 새로운 남성성을 한국의 남성들에게 부여하기 위해, 이미 구미의 남성학에서 깊이 다루고 있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성차별 주의에 편승했던 기득권을 포기하고 이를 고발하고 시정해 나간다 △가부장 제도로 인한 부담과 피해를 규명한다 △페미니즘 안의 위계와 편향을 분석하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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