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 사이버공간 전투적 논객 진중권씨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0.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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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벌어진 곳에, 그가 있다. 싸움판은 주로 사이버 공간이다. 당연하다. 이런 글이 과연 인쇄 매체에 실릴 수 있었을까? “자신있게 음모의 확증을 잡았다고 외치던 그 분들, 토론에 나와선 그냥 심증이었노라고 농담한다. 음모(陰謨)는 무슨 음모? 이렇게 음모(陰毛)를 노출하고 싶어 환장한 분들이 연출하는 한국의 정치. 한마디로 포르노다. 꺄악, 오빠, 섹시해.”(총선연대의 낙선운동에 대한 정치권의 공세를 두고)

사이버 공간을 기웃거려본 사람이라면 마지막 문장에서 전투적 논객 진중권씨(37)를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그가 한 달 전 펴낸 <시칠리아의 암소>(도서출판 다우)가 재판 인쇄에 들어갔다. 이 책은 그가 ‘진벙장’ 혹은 ‘펌돌이’가 되어 여기저기, 짬짬이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첫 문장은 ‘내가 생각하던 글쓰기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결론은 ‘잡글 예찬’이다. 그의 글은, 386 세대의 5·18 술판, 군가산점 문제, 안티 조선, 호주제, 서갑숙 파문 등 사이버 공간을 달구었던 현안에서부터, 인문학의 화두인 탈근대 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그리고 일관된 관심은, 논의 속에서 한국인의 멘탈리티를 짚어보는 것이다. 대안을 생각하면 한없이 폭폭해지는 현실을 앞에 두고, 그는 얄밉도록 가볍게 날아 오른다.

사이버 공간에서 여전히 분주하다. 소모적인 응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전혀. 그곳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담론·풍설·습속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어느 신문도 남녀 차별을 공공연하게 옹호하지 못한다. 하지만 택시 안이나 인터넷에서는 다르다. 이화여대 홈페이지를 쑥대밭으로 만든 군가산점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상징적인 제의까지 불사한다. 반면 그곳은 설득력 있는 반론을 폈을 때 그 전파력과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의 반론이 대응 논리로 활용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역동적인가.

상대방을 설득할 의사가 없는 무성의한 태도, 거친 글이 횡행한다는 지적이 있다.

그건 초기 값으로 접고 들어가야 한다. 사이버 공간은 인쇄 매체보다 높은 파토스가 필요하다. 그 혼란스러움을 갈무리해 보면 논의의 지형이 보인다. 물론 ‘안티’ 진영에서도 객관적인 근거와 주관적인 감정을 뒤섞지 말아야 하며 그 때 필요한 것이 적절한 유머 감각이다. 상대를 설득할 의사가 없다고? 솔직히 그럴 때가 많다. 나에게는 논전을 지켜보는 평범한 사람들이 중요하다. 황당한 논리를 구사하는 상대방을 굳이 ‘논박’할 필요가 있을까? 정체를 까발리는 데는, 종종 조롱이나 블랙 유머가 더 효과적이다.
책의 부제가 ‘한줌의 부도덕’인데.

‘예의 바르게 비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비판이 체제 내에 머무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존 틀을 깨려면 한줌의 부도덕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것은 미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뭔가 한 곳이 삐딱하면 생기가 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관한 비평이 흥미로웠다.‘전근대적인 탈근대 논쟁’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미세한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왜 실천적 보수로 흐를까 생각해 보았다. 탈근대를 들어 근대의 성과를 무화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렸기 때문에 근대의 성과도 챙기지 못하고, 포스트모던의 긍정성도 살리지 못한 것이 아닐까. 1990년대 우리 사회를 지배한 것은 주제넘게 냉소적인 분위기였다. 이성은 위험하고 계몽은 주제넘은 짓이 되고, 대의는 촌스럽고 모든 조직은 감옥이 되었다. 요즘 한국은 사회학자도 철학을 하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려면 서울대 입학생의 가정 환경을 분석하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

논쟁이 ‘이른바 진보 진영’ 내에서 쳇바퀴를 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강준만씨에게 안타까운 것은 남의 의도를 추론하는 것이다. 그만큼 반발도 많이 사고. 하지만 그에 대한 대응도 지형을 살피면서 할 필요가 있다. 개인에 대한, 혹은 스타일에 대한 반감과 공적인 영역을 분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대비평>이 취한 태도는 실망스럽다. 양측의 공방을 보면서 ‘비판적인 진영 내부에서조차 이견을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어떻게 적과 싸울 수 있을까?’ 하고 안타까웠다. 나도 전에 강준만씨를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러고 나니까 <조선일보>에서 전화가 왔다. 글을 쓰지 않겠느냐고. 물론 거절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에 가서 진보 진영을 비판하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들이 진보 진영의 건전한 성장을 위해 그 비판을 수용하는 것이겠나. <당대비평>이 그 정도의 정치 감각도 없을까.

당신의 이념적인 지향은?

굳이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 정도 될까. 나는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좌파’의 지향이 뭔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관념과 별개로 사회민주주의 정책에도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금의 절반을 떼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좀” 하면서 주춤거린다. 이런 마당에 이데올로기 싸움 해봤자 소용없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염두에 두는 것은?

정치적 진출만이 길이다. 지난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득표율이 2%다. 사표 방지 심리를 감안하면 심정적 좌파가 10% 가량 될까? 이것은 좌파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얘기다. 최근 일본의 윤건차 교수가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도를 그려놓았던데,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그곳에 언급도 되지 않은, 보수 우익이 한국 사회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당비를 꼬박꼬박 내는’ 민주노동당 당원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리되는 대로 1주일에 하루 정도는 당 활동에 참여할 생각이다. 좌파에 대한 신뢰감을 얻고 싶다는 그는 “그 신뢰는 이데올로기 싸움이 아니라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진중권은, ‘진벙장’과 많이 달랐다. <시칠리아의 암소>에 실린 다음 대목은 ‘무례한 진벙장에 대한 변명’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인정이라는 가면 뒤의 숨은 잔인성을 드러내고 공공연한 공격 속에 인간의 조건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감추는 글쓰기.’ 그는, 툭하면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한국 사회의 총체적인 부도덕이 흥미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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