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유 하의 시·산문·문학선집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5.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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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산문집·문학선집 동시에 펴낸 유 하씨/뒤돌아보기로 ‘이소룡 세대’ 보듬어
젊은 시인 유 하씨(33)가 책 세 권을 동시에 펴냈다. 네 번째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문학과지성사)과 첫 산문집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문학동네) 그리고 <유하문학선>(예문). 이 세 권은 시인의 개인사를 추억의 문법, 그러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방언’으로 빚어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시집과 산문집은 삶을, 문학선은 그 삶을 통과한 작품들을 갈무리한 것이다.

서른셋이라는 나이 치고는 너무 이르지 않은가?(나이는 우리 사회를 도처에서 수시로 ‘봉쇄’하는 집요한 장치다.) 시인은 아니라고 말한다. “추억만이 내 글의 에너지였다”는 것이다. 뒤돌아보기만이 에너지인 시절은 불행하다. 그러나 뒤돌아보기가 부정 당하는 시절은 더 참담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뒤돌아보며 몇 걸음 내딛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기어코 뒤돌아보는 것,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될지언정 삶은 이 모습에서 결코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시집 <세운상가…>와 산문집 <이소룡 세대…>는 시와 산문의 이중주이다. 시의 여백은 산문으로, 산문의 행간은 압축되어 시로 환원된다. 앞의 시집이 70년대 대중 문화의 상징적 거점이라면, 뒤의 산문집은 그 거점을 드나들던 ‘최초의 대중 문화 세대’(이소룡 세대)로서의 자기 확인이다. 그리하여 이 두 문학 작품은, 오늘날을 30대로 살아가는 세대론으로 확장된다.

획일적·강압적 도덕률 전복 시도

<세운상가…>가 ‘추억의 사진첩’에서 끄집어내는 세대론적 ‘기호’들은 다음과 같다. ‘한때 유행했던 것들/통기타와 포크송, 올디스 벗 구디스/리칭과 진추하, 박원웅과 함께/서금옥의 이브의 연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해도 잠든 밤하늘에 나는 못난이…’(<재즈 5>). 이 ‘못난이’들이 서성거리는 곳은 ‘모든 금지된 것들’의 근처였다. 세상의 주변부로 밀려난 금기들의 야적장에서 ‘야전’(야외 전축)의 삶은 중고 책과 해적판을 끊임없이 ‘돌리고 또 돌렸다’. “유행가를 빛나게 하던 ‘한때’는 사라져도, 그 유행가는 ‘한때’가 남기고 간 유한성의 절실함 그 자체를 에너지로 삼아 더듬더듬 삶을 연명해 간다”고 시인은 말했다.

‘서른셋, 갈수록 멀리 쓸려가는 삶/재즈처럼’. ‘꽉찬 서른셋의 나이. 무엇이 달라졌는가’. 시집과 산문집은 이렇게 서른셋이라는 시인 자신의 나이에서 출발하고 있다. 나이에 관한 자문은 삶에의 질문이고, 살아 온 날, 살아 가야 할 앞날에 대한 캐물음이다. 이 무렵의 나이는 갈수록 무거워진다. “예전에 비해 추억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시인은 말했다. 유행가의 ‘한때’를 어루만지듯 한 생애의 유행가였을 성장기, 즉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아침의 풍경’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그 풍경에 녹아들어가 있는 시인은 ‘아침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 표정은 열광과 환희로 가득했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정무문> <용쟁호투> <맹룡과강> 등 이소룡 영화를 통해 “이소룡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 아니 이소룡이 되고 싶다는 욕망. 과장되게 말하자면, 그 욕망이 내 교복의 나날을 견디게 해주었다”고 시인은 털어놓았다. 이소룡에 대한 시인의 ‘흠모’는 그 세대의 엿보기 증후군·무협영화론·신세대론으로 이어진다. 이쯤에서 시인은 영화 비평가, 나아가 문화 비평가로 탈바꿈한다(유 하씨는 93년 자신의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와 같은 제목의 영화를 감독했으며 동국대 대학원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했다).

시인의 ‘대중 문화에 대한 매혹과 반성’은 단순한 계몽주의적 분석을 뛰어넘는다. 뉴키즈 사태 앞에서 시인은 ‘무엇보다도 기성세대가 먼저 해야 할 일은 10대들에 대한 즉각적인 개탄이나 질타가 아니라 그들의 결핍이 근원적으로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바로 인식하는 일일 것’이라고 말한다. 저널리즘으로 대표되는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도덕률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무림일기>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거치면서 80년대의 정치적·물질적·성적 욕망이 뒤엉켜 타락할 대로 타락한 산업 사회의 실상을 그것과 가장 밀접한 형식으로 그려내 문단의 눈길을 끌었던 유 하씨는 지금 ‘그리움을 견디는 힘’으로 이 후기 산업사회의 치명적인 가속도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그 브레이크가 추억하기이다. 방언으로 추억하기. “최후까지 나의 방언에 충실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 문학이란 방언이 아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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