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10대는 왜 H.O.T에 열광하는가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9.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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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계 휩쓰는 H.O.T. 현상 분석/96년 데뷔 이후 최근 4집까지 승승장구… 치밀한 기획·전략이 성공 요인
발표하는 음반마다 백만장 판매는 가볍게 넘겨버리다,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4만여 객석을 가득 채우고 공연하다, 2백여 팬이 실신하고 병원에 실려가다, 그들을 열광적으로 좋아한다는 이유로 어른에게 핀잔을 들은 여고생이 자살하다, 멤버와 교제한다고 소문 난 여가수가 살해 위협을 받다….

영국·미국·일본 같은 몇몇 음악 선진국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이같은 현상이 드디어 한국에도 상륙했다. 스무 살 안팎인 청년 5명과 관련해 9월 한 달 사이에 빚어진 일들이다. 지난해에는 이들의 활동을 반대하는 인터넷 사이트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3년 전 결성된 5인조 남성 댄스 그룹 H.O.T.(Highfive of Teenage의 줄임말)는 지난 9월에 발표한 4집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그룹의 이름처럼 최소한 대중 음악계에서는 ‘10대’들의 완벽한 ‘승리’를 일구어냈다. 그들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소녀 대중을 사로잡는 영웅이자 리더이다.

차별화·일체화, 재빠른 변신 등 전략 주효

음악을 하는 가수로서 음악성이 뛰어나다거나 파격적인 모험과 실험을 하는 것도 아닌데 H.O.T.는 소녀들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가수에게 치명적인 표절 시비와 그것을 뒤늦게 시인하는 일이 발생해도 그들의 인기는 요지부동이다.

백만명 이상 되는 지지자를 거느리고 대중 음악계 안팎에서 H.O.T.가 승승장구하는 까닭은, 이 그룹이 치밀하고도 철저한 기획과 전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H.O.T.사단을 만들고 이끌어 온 이는 가수 출신 음반 기획자 이수만씨이다. SM엔터테인먼트라는 기획사를 설립하고 청소년 5명을 발굴해 팀을 조직한 이씨는, 10대의 취향을 직접 조사·분석한 뒤 그들의 입맛에 딱 맞아떨어지는 그룹을 탄생시켰다.

최근 KBS 라디오에서 음악 PD로 일하는 소상윤·신원섭·윤선원 씨는 H.O.T.를 집중 분석한 <에쵸티 즐거운 반항>이라는 책을 펴냈다. 지은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서태지와아이들이라는 대형 스타가 은퇴한 데 따른 상실감으로 가요 팬들이 스타 출현을 기대하는 욕구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그 빈자리를 메워 주기를 바라는 기다림은 뇌관을 쳐줄 합당한 대상자만 나타나면 언제든지 폭발할 상태였다.’
H.O.T.의 주 활동 무대인 방송 현장에서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가수와 팬을 볼 수 있었던 지은이들은 H.O.T.가 ‘10대의 감성을 정확하게 자극해서 폭발’시킨 요인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먼저, ‘차별화와 일체화’이다. H.O.T.를 구성하는 청(소)년 다섯은 개성을 큰 가치로 내세우면서도 집단적인 유행에도 처지지 않으려는 10대의 정서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멤버 각자가 서로 다른 개성을 표현하면서도 함께 어울려 만들어내는 조화, 곧 ‘튀면서도 같아지기’가 10대들의 취향을 단번에 충족시키고 있다는 얘기이다.

다음은, 누구보다 재빠른 변신. 젊은 대중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몇 분도 아니고 몇 초 단위로 리모컨을 눌러댈 정도’로 흥미의 지속도가 짧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찾는 취향, 취향이 변해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수많은 댄스 그룹이 단명하고 말았는데, H.O.T.는 거기에 늘 기민하게 대응한다. 그들의 대응 방식은 개성이 뚜렷한 멤버를 차례로 부각해 젊은 대중이 지루해 할 틈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감성 코드를 꿰뚫어 읽고 정확하게 반영하는 모습은, 서태지와 비교하면 얼마나 속도가 빠른가를 알 수 있다. 서태지는 음반을 발표할 때마다 음악적 경향과 패션에서 변신을 시도했으나, H.O.T.는 같은 음반 안에서 곡에 따라 이미지 변신을 꾀한다. 그 변화에는 노래 스타일뿐만 아니라 화려한 패션도 당연히 포함된다.

PD들이 꼽은 마지막 인기 요인은 ‘착한 이미지’를 활용해 부모 세대를 일단 안심시켰다는 점이다. ‘기성 세대는 10대들의 댄스 그룹 H.O.T.를 적극 지지하거나 열광하지는 않더라도 자녀들이 좋아하는 것을 허락할 정도로 무해하다고 본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지위를 누린 댄스 가수는 없었다’라고 지은이들은 말한다.

‘서태지와 전혀 다른’ 서태지 현상의 최대 수혜자

이런저런 세부적인 요인이 있다 하더라도 H.O.T.가 위세를 떨치는 가장 큰 요인은 역시 서태지 현상의 지속이다. H.O.T.는 서태지가 열어놓은 새로운 문화판의 최대 수혜자이다. H.O.T.는 서태지가 사라진 빈 자리에 가장 빨리 들어섰을 뿐 아니라, 서태지가 바꾸어놓은 질서에 가장 먼저,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해 오고 있다.

서태지가 닦아놓은 판도에서 H.O.T.가 한 발짝 앞으로 더 나아간 것은 재빠른 변신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모두 대학생이 되었지만, 데뷔 당시 멤버들은 모두 10대였다. H.O.T.는 10대의 대변자임을 자처했고, 팬들로 하여금 ‘오빠’보다는 ‘우리’라는 또래 감정을 갖게 했다.

‘10대의 반란’. 대중 음악 평론가 임진모씨는 H.O.T. 현상을 이렇게 부른다. 대중 음악계의 90년대 특성 가운데 하나는 음악계 내에서 소외되었던 집단의 반란을 꼽을 수 있는데, H.O.T. 현상도 10대 생산자와 수용자들의 반란에서 말미암았다는 분석이다. “남자 가수들이 득세하자 소외되었던 여가수들이 요즘 다시 일어섰듯이, 20대가 주도한 가요계에서 10대들이 생산자와 수용자로서 떠오른 것이다. 그같은 움직임이 다른 나라보다 더 빨리 온 것이라 볼 수 있다”라고 임씨는 말했다.
‘반란’ 혹은 ‘반항’이라고는 하지만, H.O.T.는 서태지처럼 기성 세대에 대해 진짜로 반항하지는 않는다. 좋은 의미에서든 그렇지 않은 의미에서든, 이것도 서태지에게서 한 발짝 앞서 나간 것이다. 방송사에서 복장을 규제하면 거기에 맞서 싸웠던 서태지와 달리 H.O.T.는 곧바로 순응한다. H.O.T.가 10대의 처지에 서서 아무리 불만을 토로해도 반항한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들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와 기성 세대를 향한 것이 아니라, 10대들에게 향해 있다. 서태지 현상의 최대 수혜자로서 서태지를 이어받은 것은 틀림없으나, H.O.T.가 받은 것은 내용이 빠진 이미지뿐이다.

H.O.T.를 이야기할 때 ‘기획 상품’이라는 말이 항상 따라붙는다. H.O.T. 는 서태지가 가동하기 시작한 90년대의 스타 시스템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이다. 서태지가 ‘주류 질서의 전복자’ ‘신세대의 대표자’ 소리를 들으며 90년대 한국의 문화 지형에 큰 충격을 준 것과 달리, H.O.T.가 별다른 충격이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까닭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들은 문제 의식을 가진 뮤지션이라기보다는 이수만씨가 표현했듯이 엔터테이너인 것이다.

가수보다 엔터테이너 이미지 훨씬 강해

팬 숫자가 서태지보다 훨씬 많고 상업적으로도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H.O.T.라는 ‘작품’ 또는 ‘신드롬‘에 대한 비평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3집부터 멤버들이 곡을 만들고, 최근의 4집에 이르러서는 타이틀곡 <아이야!>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곡을 멤버들이 직접 썼지만, 그들에게는 음악을 하는 ‘가수’라기보다는 ‘엔터테이너‘로서의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강하다.

H.O.T.를 호의적으로 분석한 KBS 음악 PD들도 이 점을 한계로 꼽는다. ‘특별히 H.O.T.의 음악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있을까. 이 물음에 지금 당장 답변해야 한다면, 대답은 아니오 쪽에 가깝다. 아직 H.O.T.는 많은 요소들의 짜깁기로 구성된 그림처럼 보인다.’

“한국 음반 시장의 볼륨을 크게 만들었다는 점 외에는 사회 문화적 의미로 보아 H.O.T.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게 거의 없다. 서태지는 가치나 태도나 주장에서 문화적 에너지를 갖고 있었지만, H.O.T.는 철저하게 쇼 비즈니스 전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대중 음악 평론가 김종휘씨의 말이다.

청소년기의 불안한 마음과 입시 지옥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영웅 숭배’와 ‘스타 소비’로 해소하는 소녀 대중에게 H.O.T.는 지금 더없이 좋은 상품이다. ‘싹쓸이’를 통해 음반 시장을 교란하고 수많은 아류의 원조라는 부작용도 없지 않지만, H.O.T.는 10대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세련된 문화 상품인 것이다. 9월의 사건들을 집단 히스테리로 몰아붙이면서 비난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획 상품’ H.O.T.와 상품 소비자 들은 10대들의 세계에서 그들만의 코드로 소통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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