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론]“뽕짝은 일제 식민 통치 소산
  • 노동은 교수 (목원대·한국음악) ()
  • 승인 1995.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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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찬씨 주장에 반론… “전통 음계론으로 해석 불가”
한국에서 ‘뽕짝’ 논의는 한국 대중가요사의 한 장르에 대한 논의일 뿐이다. 한국 대중가요사 자체가 곧 트롯식 뽕짝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은 논의의 출발점이 우리 민족에 고유한 사회문화 테두리 안에 있느냐, 그 밖에 있느냐에 따라 풀릴 문제이다. 지금까지 트롯식 뽕짝이 한국에서 자생했다든가, 또는 그 원류가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주장들은 모두 한국의 역사와 사회문화 이론의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그럴 경우 비교되는 논의들 자체가 ‘오류’이며 ‘원인 무효’이다.

우리 역사에서 뽕짝 논의가 뜨거운 감자였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제 치하에서, 해방 공간에서, 50년대에, 80년대 중반에 끊임없이 그 정체성 밝히기가 진행된 이유는, 뽕짝이 일제 폭력의 잔재 요소이고, 그것을 청산하지 못한 채 우리의 현대 음악적·사회적 구조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논의를 할 때마다 음계로 비교하며 다른 재료를 포함하지 않는 이유는, 음계만으로도 논의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결과이지, 뽕짝 음악의 사회·문화적 시스템(재료·사회·표현) 이론에 접근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 음계론은 고이즈미 후미오식 일본 전통 음계론과 서양식 요나누키 장·단 음계로 접근하여 분석하는 경우가 있다. 음향적 재료로 접근하여 엔카와 뽕짝이 일본 전통 음계인 미야코부시 음계와 같고, 박자 역시 일본 민족의 특성인 2박자라고 분석해내는 것은 그밖의 음계나 박자를 포함하는 상징적 설명이다. 트롯이 미야코부시 음계가 아니라 요나누키 단음계이기 때문에 그 음계론으로 왜색 여부를 가릴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음계론으로 분석하는 것이 옳으냐라는 분석 방법의 차이에 근거한 것이다, 어느 하나로 분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강변일 뿐이다.

교류할수록 독자적인 음악 문화 발달

곧, 분석의 다름은 ‘적용의 오류’가 아니라 ‘적용의 방법’이다. 적어도 일본은 종전(終戰)까지 우에하라 로쿠시로의 ‘미야코부시 음계와 이나카부시 음계론’이 주종을 이루었다. 더욱이 한국의 뽕짝이 자생적이면서도 한·일간 영향을 주고 받으며 독자적으로 발전한 대중 가요라면, 그 음계론은 민족 전통의 음계론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 음향적 재료론으로는 어느 경우에도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뽕짝은 땅에서 솟아났는가,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이 문제 자체가 일본의 한국 강점기라는 지울 수 없는 역사적 환경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가 한국 민족의 음악을 해체하고 황민화를 획책한 강압적인 사회 조건에서 나온 음악이 엔카의 아류인 트롯식 뽕짝이다.

물론 전후의 고이즈미 후미오 음계론이나 그밖의 서양 7음 음계에서 제4음과 제7음을 뺀 요나누키 음계(요나누키 장·단 음계)로 분석할 수 있지만, 그 경우는 한·일 각각의 음악이 역사적인 전통 음악과 무관하게 서양식 평균율로 구성음을 갖출 때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일본의 그것이 요나누키 음계론으로만 분석되지 않듯이 한국의 그것도 그 음계론으로만 적용할 수 없다. 뽕짝이 태동했던 지난 시기의 음계론이나 네 가지 일본 전통 음계론의 하나인 미야코부시 음계로 분석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는 엔카의 초기 작품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우리 음악이 서양과 만났다면 그 음악이 반드시 `지금의 트롯으로 변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이미 삼국시대 이후로 우리는 중국·일본 음악과 교류해 왔으며, 그 음악들의 재료가 우리와 유사한 음계와 박자를 부분적으로 공유했을지라도 우리는 항상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서양 음악의 이론과 실제를 만나 영향을 받았던 조선 후기에도 한국 음악이 더욱 독자적이었음은 홍대용·서유구·이규경·최한기 등의 음악론과 당시의 음악계를 보아도 검증할 수 있다.

엔카의 아류인 트롯식 뽕짝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1910년대 이전인 1894년 청일전쟁 직후부터 일본군과 일본인 거류 지역에서, 그리고 1904년 이후 한국을 식민지 전진기지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황민화를 목표로 한국 민족의 전통 음악을 해체하면서 일본 음악을 제도화하는 체계적 왜곡 과정에서 잉태와 탄생을 거듭했다. 게다가 뽕짝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현대사의 친일 구조, 그리고 일본의 비디오케식 노래방과 방송계의 추억 프로그램으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지, 국가 대 국가나 민족 대 민족이라는 자연스러운 교류 과정과 서로의 발전 과정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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