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음악]이승환 댄스 뮤직에 도전장
  • 강 헌 (대중 음악 평론가) ()
  • 승인 1995.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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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러브 발라드 앨범 출반… 대중성 높은 ‘감수성의 백화점’
웬만한 앨범 10개는 너끈히 제작할 수 있는 물량을 투입한 대형 앨범이 나타났다. 라는 제목으로 출반된 이 묵직한 앨범을 만든 사람은, 89년 <텅빈 마음>과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를 앞세워 단숨에 정상권에 등극하여 지금까지 정규 앨범 3장을 낸 이승환이다. 그는 또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작곡한 오태호와 함께한 듀엣 앨범 <2·5·共·感>과, 94년 여름의 최대 성공작 <마법의 성>을 담고 있는 <더 클래식> 앨범을 프로듀스하기도 했다.

90년대는 시각적 상상력을 절대적인 지표로 삼으면서 80년대 우리 대중 음악의 거장들, 가령 주류 쪽의 조용필·이선희·변진섭, 비주류 쪽의 들국화·김현식을 2선으로 퇴진시켰다. 이승환은 90년대라는 그 ‘통과 제의’를, 완성도를 첫째로 하는 앨범 제작과, 브라운관보다 라이브 콘서트 우선이라는 명확한 전략으로 극복함으로써 대중 음악계에서 살아 남은 보기 드문 가수이다.

91년의 두 번째 앨범 에 최희준의 <하숙생>을 한 발짝 빠르게 리메이크하여 수록한 데서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스탠더드 팝을 중심으로 놓고 다양한 음악 사조를 충만한 재기로 변용하는 능력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명백히 시장의 주역인 10대의 주류 정서에 부합하면서도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유산인 네트워크로부터의 자기 관리에 충실하여 스스로 거물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창출해 왔다. 그런 그가, 몇 장의 댄스 뮤직 앨범이 초강세로 주도하는 흐름에 밀려 윤종신·한동준 같은 중견 발라드 뮤지션이나 김창완·장필순 같은 맹장들이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는 95년에 일전불사의 구두끈을 단단히 맬 수밖에 없음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네 번째 정규 앨범 의 크레디트는 펼쳐 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호화롭다. 이승환은 주류 대중 음악 영역에서 댄스 뮤직이 텔레비전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건설한 리듬·안무·패션이라는 성채를 공략하기 위해 모든 참모들을 집결시켰다. 그 삼각 프로듀서 시스템의 한 꼭지점은 미국의 데이비드 캠벨이, 또 다른 꼭지점은 지난 세 번째 앨범에서 두 곡을 제공한 015B의 정원석이 맡았다. <더 클래식>의 김광진과 그룹 전람회의 김동률 및 김현철이 작곡자와 편곡자로 가담했으며, 알토 색소폰의 에릭 마리엔탈을 위시한 미국 스튜디오의 세션들과 현악 오케스트라, 신윤철·박청귀·손진태(기타)·박용준(피아노)·이태윤(베이스)·배수연(드럼) 등 쟁쟁한 국내 연주자, 조규찬·이소라·박승화 등 백 보컬진과 또 다른 국내 현악 오케스트라가 가세했다.

열악한 제작 여건 돌파할 집념 필요

하지만 이처럼 엄청난 제작비가 과시용으로만 소모된 것은 아니다. 이승환은 신승훈의 전매 특허인 비애의 발라드 <천일 동안>을 타이틀곡으로 하여, 정석원 특유의 냉소적인 여성관이 여과 없이 토로된 <악녀 탄생>을 거쳐, <체념을 향한 미련>과 <다만>에 이르기까지 앨범 초반부에 실연으로 인한 억하심정을 집중적으로 형상화했다. 이승환이 신승훈 스타일과 정석원 스타일을 혼합하면서 노린 것은 ‘좋았던 장르’인 러브 발라드의 대중성을 더욱 끌어올림으로써 댄스 뮤직에 대응하는 전선의 성격을 명확히 하자는 것이 아닐까?

그야말로 메탈계를 제외한 현재 한국 대중 음악의 주류와 비주류를 망라한 감수성의 백화점이다. 빈틈을 주지 않는 이 앨범은 틀림없이 애호가들에게 충족감을 주겠지만, 그리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정교하고 순도 높은 사운드를 들려 주겠다는 의지도 높이 평가하고 싶지만, 요즘 정상급 대중 음악가들에게 유행처럼 번지는 미국 스튜디오에서의 작업은 재고해 볼 만하다. 적어도 이 ‘어린 왕자’에게는 이제 완성도를 향한 욕망보다 열악한 제작 여건을 적극 돌파하겠다는 집념이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국내에서 제작하고서도 거의 환각적인 코러스와 현악 합주 속에 신윤철과 박청귀가 혼신의 연주를 들려주는 <너의 나라>가 그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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