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악극·신파극, 보수화 물결 타고 유행
  • 안치운 (연극 평론가) ()
  • 승인 1998.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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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극·신파극, 보수화 물결 타고 유행…현실 외면한 ‘눈물 짜기’
한국 연극의 위기가 더해 가고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극단조차 공연을 하지 못한 채 해를 넘긴 예가 많아졌다. ‘97 세계 연극제’ 실패와 그 후유증 때문일 것이다.

한국 연극계가 겪는 혼란은 연극이 지금까지 지녀온 예술로서의 가치가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동안 내세웠던 예술적 가치가 다른 나라 연극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형편없다는 인식과 자괴감을 주기도 한다. 예컨대 동아시아 연극을 특집으로 정한 98년 아비뇽 연극제가 ‘한국 연극은 볼거리가 없다’고 하면서, 연극 대신 궁중 음악을 출품하라고 해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신파극·악극은 수입한 무대 예술

한국의 현대 연극은 오랫동안 오늘의 연극이 아니라 어제의 연극에 머물러 있었다. 연극 양식과 이념에서 어제와 오늘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착종 상황이 한국 연극의 위기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제 한국 연극에서 작품을 가지고 진보와 보수, 예술과 운동, 실험과 개혁으로 나누는 작업은 불가능해졌다. 한국 연극의 지형은 급격하게 몰락하고 있다. 그 끝은 한국 연극의 보수화이다.

한국 연극은 기이하게 변모하고 있다. 97년 포르노 연극에 관한 논쟁이 뜨거웠을 때, 한국연극협회를 중심으로 한 극단과 연극인들은 ‘저질 포르노 연극이 한국 연극을 좀먹는다’고 비난했고, 지금까지 연극인들이 세운 고귀한 전통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분노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저질 포르노가 아니라 고급 포르노, 벗을 이유가 있는 정당한 포르노 연극을 만들어 대항하겠다고 했다. ‘정통 포르노 연극’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정통 포르노 연극은 보수주의가 지배력을 행사하는 한국 연극의 복잡한 변형과 착종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저질 포르노 연극과 정통 포르노 연극을 구분한 것은 연극계의 분열을 보여줄 뿐, 결코 진보주의적 연극과 보수주의적 연극이 대립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뒷골목 연극을 저질 포르노 연극이라고 규정하면서 진보적인 자세를 취하는 보수화한 한국 연극의 실천 방식에 있다.

97년 포르노 연극에 관한 논쟁에 이어 <이수일과 심순애> <홍도야 우지 마라> <울고 넘는 박달재> <번지 없는 주막>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불효자는 웁니다> <눈물 젖은 두만강> 등과 같은 악극이 부활한 것은 한국 연극의 보수화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악극이 지닌 주제와 정서는 관객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관객들은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즐길 뿐이다. 악극을 재현하는 극단들은 지금까지의 연극이 젊은 관객을 위한 것이었다고 보고, 악극을 통해 연극과 거리가 먼 중년층 이상 관객을 끌어모으고자 한다. 악극을 부활시키는 것이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천박한 시도라는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신파극이 일본의 신파 연극을 모방하고, 일본의 소재를 각색해 일본식 연기를 한국화한 것이라면, 악극은 유행가와 연극을 결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땅에 연극의 유산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바깥에서 수입한 것을 토착화한 연극 양식인 것이다. 악극과 신파극은 창극·가무극·연쇄극 등과 함께 지식인들이 아닌 대중으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고 유지되었다. 그후 ‘새로운 연극(신극)운동’을 주도한 이들의 진보주의적 기세에 눌려 황급하게 몸을 감추었던 것이다.

자본 논리로 ‘소박한 정서’ 자극

악극을 주로 하는 극단 ‘가교’는 “버려진 유물과 같은 악극을 부끄럼 없이 재현한다”라고 말한다. 소박한 순정이 담긴 그 옛날의 악극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재현된 악극은 크고 화려한 극장에서, 브라운관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배우에 의해 공연된다. 악극을 지난 시대의 골동품으로 여겨 이를 되새겨볼 때가 되었단 말인가? 어떤 젊은 배우는 스스로를 악극 배우가 다 되었다고 말한다.

문제는 악극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부활이다. 다시 소리를 낼 수 있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그 소리를 듣고자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소리가 울려퍼지는 방향이 어디인지 확인해야 한다. 악극은 30년대에 유행했고, 한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재현되고 있다. 연극은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가난할 수밖에 없는 예술이다. 주목할 것은 연극의 위상이 축소되는 이때, 악극이 부활했다는 점이다. 연극이 자본주의 시대에 반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된다면, 악극은 뮤지컬이 그러하듯 자본주의적으로 생산·소비된다.

부활한 악극은 유랑극단이 아니라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화려하게 막을 올린다. 옛날 방식으로 노래하고, 감상을 토로하고, 개인의 감정을 피력한다. 새로운 날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회고한다. 관객들은 즐겁게 오늘을 잊는다. 고통스런 오늘을 망실하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슬픈 노래에 기쁨이 소리가 되어 울린다. ‘오빠~아가 이~있다’고 노래하면서, 그 노래의 뒤를 질질 이어 가면서. 비판과 반성 대신 한바탕 눈물과 한숨을 자아내되 관객의 삶에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퍼질 대로 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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