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복고풍·재활용 TV 프로 인기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8.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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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복고풍·재활용 프로, 시청률 급상승… “불투명한 미래 정보와 위안 얻기 위해 주목”
방송 3사가 부산하다. 뉴스에서 드라마·쇼·다큐멘터리까지, 없는 것 없이 갖춰진 이들 방송사의 ‘텔레비전 백화점’은 요즘 ‘IMF 맞이 새 단장’에 바쁘다. IMF 사태 이후 이 백화점을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시청률 조사 전문 기관인 미디어서비스코리아에 따르면, 97년 11월과 12월 방송 5개 채널(KBS1·2, MBC, SBS, EBS)에 대한 평균 가구 시청률은 46.8%와 49.6%였다. 이는 96년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2.2%, 2.1%가 늘어난 수치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KBS 최충웅 편성실장은, IMF 사태 이후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현실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정보를 취득하려는 욕구가 이같은 결과를 낳았으리라고 분석했다. 경제 불황으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시청률이 높아졌다는 분석도 있다. 김창남 교수(문화 평론가·성공회대)가 지적한 대로 텔레비전은 ‘가장 값싸게 위안과 오락을 얻을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KBS1 <9시 뉴스>, 시청률 마의 40% 벽 돌파

백화점에 들어서면 몇 가지 변화가 눈에 띈다. 1층 중앙 로비에는 ‘뉴스 광장’이 서 있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백화점의 얼굴이자 자존심이다. 그러나 이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의 반응은 예전 같지 않다. 이 광장을 습관처럼 훑어보고 지나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대신 광장 구석구석, 특히 경제 코너를 꼼꼼히 살핀다.

뉴스 프로그램에 대한 폭발적인 시청률은 최근 방송가에 불어닥친 가장 큰 변화로 손꼽힌다. 일반 국민이 경제 위기를 본격적으로 감지하기 시작한 지난해 11월께부터 뛰어오르기 시작한 뉴스 시청률은 석 달이 지난 지금까지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뉴스 제작자들마저 ‘비정상적인 시청률’이라고 고개를 내저은 이 기간에 KBS1 텔레비전의 <9시 뉴스>는 한 번도 빠짐없이 시청률 상위 10위권 프로그램 안에 드는 기록을 세웠다(85쪽 인터뷰 참조). 지난 1월23일 이 프로그램은 시청률 40.6%로 ‘마의 40% 벽’까지 깨뜨렸다.

뉴스 광장을 나서는 순간 사람들의 발길은 흩어지기 시작한다. 가장 발길이 많이 몰리는 곳은 이른바 ‘복고풍 매장’과 ‘재활용 매장’이다.
최근의 ‘신파’ 유행을 등에 업고 등장한 복고풍 매장의 기세는 맹렬하다. MBC는 지난 4일 수목 드라마로 <육남매>를 신설했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 가장을 잃은 과부와 여섯 남매가 역경을 이겨 가는 과정을 그린 이 드라마는, 20.3%의 시청률로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방송사에 기록될 만한 인기를 끌었던 70년대 초 드라마 <아씨> 또한 KBS2에서 90년대 배우들의 외피를 빌려 환생했다. 지난해 가을부터 방영한 이 드라마는 경제 위기와 때를 맞춰 인기가 수직 상승하고 있다. 때문에 KBS는 원래 2월1일 종영하기로 했던 이 드라마를 주말 황금 시간대(오후 8시)로 옮겨 3월 말까지 연장 방영하기로 결정했다.

과거 인기 드라마나 프로그램을 재방송하는 ‘재활용 매장’도 이에 못지 않게 사람이 북적댄다(실제로 방송사들은 요즘 ‘재방송’ 대신 ‘재활용 프로그램’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MBC와 SBS는 오전 8시대에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아들과 딸>과 <옥이 이모>를 각각 다시 내보내고 있다. 재방송 프로그램이면서도 주요 시청 시간대(오후 10시)에 주 4회씩 방영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SBS의 <모래시계>도 95년 첫 방영 당시의 폭발적인 반응에는 못미치지만 여전히 평균 시청률 20%를 넘나드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발길 뜸한 ‘신제품 매장’

이런 ‘단순 재활용’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이재현 교수(충남대·신문방송학) 표현을 빌리자면 ‘패키지형 재활용’ 매장이다. 지난 연말 KBS는 <한국 문화유산 시리즈>를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는 KBS1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일요 스페셜>에서 이미 방영한 작품 가운데 화제작만을 뽑아 만든 것이었다.

MBC는 주 5회(월∼금) 방영되는 <남자 셋 여자 셋> 가운데 세 편을 가려 뽑아 일요일에 재방송하는 방식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올들어 세 차례나 재방송이 시청률 10위권 안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방송 제작자들은 이들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정서를 어루만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기 요인을 찾는다. <남자 셋 여자 셋>을 연출하는 송창의 PD는 방학이 끝난 뒤에도 시청률이 줄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청춘 시트콤’인 이 프로그램 시청층에 ‘아저씨·아줌마 부대’가 대거 가세하고 있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암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시청자들이 가볍고 발랄한 드라마를 통해 위안을 얻는 듯하다는 것이다.

복고풍 드라마들은 ‘해피 엔딩’을 약속한다. <아씨>는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성으로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낸다. 곱게 늙은 <육남매>의 어머니는 편안해 보이는 소파에 앉아 ‘기억할까요? 아이들이 그때 일을’이라며 드라마를 이끌어 나간다. 고생 뒤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미리 못박아 두어 시청자들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나마 신이 났던 복고풍·재활용 매장을 나서는 순간 사람들은 갈 곳을 얼른 정하지 못한다. 이들 매장의 인기는 신제품 매장이 보잘것없다는 반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경제 관련 프로그램이다. 올들어 방송사들은 ‘방송사 스스로 철저한 내핍과 긴축 경영으로, 국민과 함께 고통을 극복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한국방송협회 공동 대응 방안(12월12일)에 따라 일제히 경제 관련 프로그램을 신설하거나 새로 단장해 선보였다. KBS1의 <한국 경제 이렇게 하면 산다> <경제, 주부가 나섭시다> <경제 전망대>, KBS2의 <힘 내세요 사장님>, MBC의 <테마기획 탈출 IMF>, SBS의 <알뜰정보 비상구를 찾아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프로그램은 대부분 낮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이 시청 사각 지대인 오전 또는 늦은 밤(심지어 자정을 넘어 시작하는 프로그램도 있다)에 집중 배치되어 있을 뿐더러, 내용도 계도성 일색이어서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방송개발원 프로그램 모니터 팀의 지적이다.

장해랑 한국프로듀서연합회장은 이같은 사태가 빚어진 이유를 최근 방송사들의 잘못된 구조 조정 방식에서 찾았다. 방송 개혁을 공약으로 내건 새 정권 출범과 광고 격감이라는 절박한 현실에 밀려, 정책 결정권자 몇몇이 졸속으로 입안한 하향식 구조 조정 방안으로는 제작 실무진의 창의력과 기획력이 가미된 프로그램이 탄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텔레비전을 통해 정보를 취득하고 ‘카타르시스(배설)’ 아닌 ‘리크리에이션(재충전)’을 얻고자 하는 시청자들의 욕구가 온전히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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