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음악]조용필의 음악 인생30년
  • 蘇成玟 기자 ()
  • 승인 1998.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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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30년간 앨범 17집 발표
바람 끝이 차갑던 68년 2월, 기타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선 열여덟 살 청년이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 앳된 용모, 거기에 변변찮은 기타 실력. 청년은 파주·문산 등 경기도의 미군 기지촌을 떠돌며 이 악단 저 악단 기웃거렸지만 구박만 받고 쫓겨났다.

그로부터 30년. 그 청년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아성을 구축한 대중 음악계의 거장으로 우뚝 섰다. 조용필. 그가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77년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무대 뒤로 사라졌을 때만 해도, 그가 한국을 대표할 만한 국민 가수로 성장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딴따라’에서 ‘아티스트’로

11월7∼9일 조용필의 가수 데뷔 30주년을 기념해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음악 인생 30년〉 콘서트. 1만2천여 장에 달하는 입장표가 공연 2주 전, 발매된 지 사흘 만에 동이 났다. 〈단발머리〉에 열광하던 소년·소녀 팬들이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지만, 11월7일 공연에서 그들은 ‘작은 거인’ 조용필에 대해 꺼지지 않는 관심과 열정을 보여주었다.

대중 음악 평론가 강 헌씨의 표현에 따르면, 조용필은 ‘한국의 현대 대중 음악사 그 자체’이다. 보잘것없던 열여덟 살 기타리스트를 그같은 지위에 올려 놓은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 답은 조용필의 ‘순도 높은’ 음악적 열정에서 찾아야 한다. 그는 스스로 음악이라는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서 고독한 절대 군주처럼 지내 왔다. 취미도 음악이다. ‘엔터테이너’가 각광받는 시대에 그는 여전히 ‘아티스트’로서 매스컴의 눈길을 받는 보기 드문 스타이다.

그가 처음부터 직업적 음악인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고교 2학년 때 자살 소동까지 벌인 데에는 반항심도 컸다. 아버지는 1901년생이니까 살아 계시다면 올해 만 97세다. 당신 세대에 음악인이란 천대받는 ‘딴따라’에 지나지 않았다. 아들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누구에게 말조차 할 수 없던 때였다. 처음에 나는 그저 취미로 음악을 좋아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못하게 말리는 바람에 삶이 그렇게 흘러온 것 같다.”

미군 클럽들을 헤매고 다니던 시절, 대마초 파동으로 절치 부심하던 시절의 조용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고독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용필의 말은 다르다. “혼자 지냈다고 해서 쓸쓸하거나 고독했던 적은 없다. 사람들이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보았을 뿐이다. 나는 전혀 달랐다. 혼자 있어도 늘 음악 때문에 할 일이 많았다. 지금은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 예전보다 편안해진 것뿐이다.”

“나는 한번도 대중을 뒤쫓은 적이 없다”

조용필이 가요계에 투신한 이후 고독을 느꼈다면, 그것은 어쩌면 그가 〈창 밖의 여자〉로 화려하게 컴백했던 80년대부터였을지 모른다. 인기에는 초연할 수 있지만, 팬들의 기대에 찬 눈빛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요계에 오래 머무르면 부닥치는 문제가 있다. 선배들이 그랬듯이, 가수는 히트 곡 없이, 대중의 호응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내게 그런 초조감이 전혀 없다면 거짓이다. 새 앨범을 발표할 때는 안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늘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음악적 실험을 거듭하며 새 앨범을 낼 때마다 파격적인 면모를 보여 왔던 그 역시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잘 납득되지 않는 대목은, 그러면서도 그가 대중의 취향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심지어 그 흔한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한 편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의 카리스마는 대중의 정서를 휘어잡는다. 역설적이지만 그 힘은 오히려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고집스럽게 밀어붙여 온 ‘비대중성’에서 연유한다.

“나는 대중을 쫓아가 본 적이 없다. 항상 대중이 내 음악을 따라오게 했다. 대중의 입맛만 생각했다면 〈단발머리〉나 〈고추잠자리〉 같은 노래를 시도할 수 있었겠는가. 음악적 감각이 떨어진다 싶으면 정초에 외국에 나가 CD를 2백∼3백 장 사와서 다 듣는다. 더 들을 필요가 있는 곡만 체크해 두었다가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곡들이 많아 주로 흐름만 기억해 둔다.”

결국 그는 모든 문제를 음악 안에서 고민하고, 그 해결책도 음악 안에서 찾아 왔다.

그는 17집 앨범이 완성되자마자 18집 준비를 시작했을 정도로 자기가 걸어가야 할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간다. 그는 20세기를 마감하며 ‘메모리 & 굿바이’라는 개념으로 내년 8월께 18집을 발표할 계획이다.

1인 콘서트 시대 열기도

그는 음악을 위해서라면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를 얻었던 76년 이전에 이미 내가 이끌던 밴드(조용필과 그림자)는 밤무대에서 최고 수준의 개런티를 받았다. 방송 출연 가수들보다 더 많이 받았다. 어렵게 지냈다는 무명 시절에 그러했다. 우리보다 더 좋은 장비를 갖고 있는 밴드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번 돈을 모두 악기나 마이크 시스템 같은 장비에 투자했다. 더 좋은 음악을 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도 ‘위대한 탄생’을 유지하는 데에만 1년에 3억원이 넘는 돈을 투자한다.

조용필이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이룩한 업적은 지금까지 기록해 온 음반 판매량이나 공연 횟수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싱어송라이터로서 대중 음악의 방향을 제시했으며, 리사이틀 수준을 넘어 1인 콘서트 시대를 열었고, 앨범다운 앨범 제작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레코드사의 일방적 거래 관행에 맞서 직접 기획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그의 음악 열정이 가장 빛나는 지점은 역시 콘서트 무대다. 청중과 직접 만나는 라이브 콘서트야말로 한 음악인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보컬과 연주, 조명과 음향 등 라이브 콘서트에서는 그 무대를 이끌어 가는 음악인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처럼 완벽한 콘서트 이면에는 그의 철저한 준비와 연습을 빼놓을 수 없다. 〈음악 인생 30년〉의 리허설이 한창 진행되던 11월4일 서울 신사동의 화이트 스튜디오. 가죽 점퍼를 입고 연주 상황을 점검하는 조용필의 모습은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나 진배없었다. 한국 최고 수준의 연주 기량을 갖추었다는 ‘위대한 탄생’ 멤버들은, 수년 간 호흡을 맞추어 환상적 하모니를 보여주었지만 털끝만큼의 오차도 허용치 않으려는 조용필의 예봉을 피하지 못했다. 콘서트의 무대 시설이나 조명에 대해서도 까다로운 주문이 잇따랐다. 오후 내내 리허설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한순간도 느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철저한 공연 준비에 관한 그의 명성에는 ‘거품’이 없었다.

조용필은 끼니를 굶던 초창기 밴드 시절부터, 대마초 파동 이후 야인으로 지냈던 3년 세월에 이르기까지 피나는 자기 연마를 통해 전화 위복의 도약을 이룩한 주인공이다. 그는 후배 음악인들에게도 연습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연습을 통해 모든 걸 성취할 수 있다. 내 나이에 특별히 연습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래도 나는 매일 연습한다. 연습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거품 없는 열정과 부단한 노력으로 험난한 역경을 극복해 온 조용필의 음악 인생 30년. 경제 난국으로 많은 사람이 시름에 젖어 있는 이즈음, 큰 가수의 노래와 더불어 그의 인생 역정 또한 돌아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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