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토론 프로그램 신설 붐
  • 蘇成玟 기자 ()
  • 승인 1998.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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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찬반 형식 토론 프로 신설 붐…미숙하지만 ‘큰 걸음’
텔레비전에 전례 없이 ‘이야기꽃’이 활짝 피고 있다. 가을 개편과 함께 방송사마다 찬반 형식의 본격 토론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이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EBS 〈난상 토론〉, KBS 〈길종섭의 쟁점 토론〉, SBS 〈갑론을박 동서남북〉이 그같은 프로그램이다.

새로운 형식의 토론 프로그램들은 일단 환영받고 있다. 찬반식 토론은 기존의 회의식 토론보다 한 발짝 앞선 토론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임태섭 교수(광운대·신방과)는 “이제 한국 사회에도 ‘쟁론’ 개념의 본격적인 토론 방식이 도입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서양 사회에서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쟁론(爭論;debate)이 발달했다. 이해 관계를 떠나 순수하게 논리만으로 대결하는 ‘차가운 머리 싸움’이 바로 쟁론이다.

논리적 사고력=국가 경쟁력

현재 선진국, 특히 미국에서 성행하는 토론 대회가 쟁론의 좋은 예다. 미국에서는 중·고등학교 학생 때부터 전국 규모로 열리는 각종 토론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주제는 몇 달 전에 고시되지만 참가를 신청한 팀의 찬반 진영 구분은 대회 당일, 토론 한 시간 전에 통보된다. 준비해 온 자신들의 역량을 토론 직전에 찬성이나 반대 어느 한 편으로 집중해야 한다. 변호사들이 의뢰인에 따라 전혀 상반된 논리를 전개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일본만 해도 이런 토론 방식이 이미 반세기 전부터 도입되어 미국과 일본 양국 고교생들이 한 해에 수 차례 토론 대회를 한다. 이렇게 토론을 통해 논리적 사고력을 배양한 국민이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임태섭 교수는 “역대 군사 정권은 ‘국론 통일’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다양한 사회적 담론을 억제했다. 토론 문화가 발전하지 않고서는 선진국으로 갈 수 없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아직 찬반식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문제점도 노출되고 있다. 우선 석연치 않은 주제가 토론 의제로 등장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의제를 잘못 선정하면 토론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평지풍파’를 일으켜 자칫 정책을 입안하는 데 혼란만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11월10일 첫 방영된 SBS 〈갑론을박 동서남북〉은 ‘성인 영화 전용관, 필요악인가? 포르노의 신호탄인가?’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여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주제는 96년 헌법재판소 결정과 그에 따른 후속 조처로 새롭게 논쟁 거리가 될 수 없는 사안이어서 공허한 말싸움만 유도한 꼴이 되었다.

ARS 여론조사 ‘신뢰성’ 의문

고배현 국장(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시민입법위원회)은 적절치 못한 주제의 예로 사법고시 합격 인원을 확충하는 문제를 내걸었던 한 토론 프로그램을 꼽았다(가을 개편 프로그램은 아님). 그는 “국민 대다수 염원에 따라 이미 결론이 난 사안이었다. 그런데 반대하는 이해 당사자측 논리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바람에 사안을 새롭게 쟁점화하는 잘못을 범했다”라고 비판했다.

새로운 찬반식 토론 프로그램의 특징인 ‘자동 응답 시스템(ARS)’에 의한 여론조사 방식도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전화나 PC 통신을 통해 시청자들로부터 생방송 도중에 찬반 여론을 동시 집계하는 것이 ARS 방식이다. ARS 방식은 조사 대상이 분명하지 않아 여론조사의 기본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시청자층이 제한되어 있는 데다, 제한된 시청자 중에서도 적극적 행위자의 의견만 반영된다는 점에서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

<중앙일보> 김 행 여론조사 전문 기자는 한 주부 프로그램에 나갔다가 ARS 결과에 놀란 적이 있다. 학생들이 투표를 통해 교사를 교체해도 되는지 여부를 놓고 ARS로 찬반 여론을 조사했는데, 찬성 논리가 90% 가까운 지지로 압승을 거두었다. 촌지 교사에 대한 피해 의식을 가진 주부들이 시청하는 프로였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김기자는 당시 실제 여론은 찬반이 팽팽했는데도 ARS 결과에 대한 특별한 해설 없이 방송이 진행되어 위험스러웠다고 말했다.

ARS 방식은 시청자 참여를 유도하고 토론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프랑스처럼 토론 문화가 발달한 주요 선진국에서도 뉴스 시간 첫머리에 ARS를 가동해 끝날 즈음에 그 결과를 발표하기도 한다.

프랑스가 한국과 다른 점은 ARS 방식이 ‘현재 이 방송을 시청하는 사람들의 제한된 여론’이라는 사실을 꼭 알린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ARS 결과에 대한 ‘보정’ 기회를 반드시 마련한다. ARS 결과가 어떤 조사 환경에 의해서 그렇게 나타났는지, 전체적인 여론조사와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를 풀이해 오해할 여지를 싹부터 자른다. 그런데 KBS와 SBS는 이러한 기본 사항도 이행하지 않은 채 ARS 방식을 사용했다.

토론 진행자의 자질도 중요하다. 흔히 일반 프로그램의 토론 코너에서는 단지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연예인이나 인기인 출연자 들을 찬반 토론 진행자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여론조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진행자는 통계의 의미를 왜곡할 소지가 크다.

“토론의 기본은 말하기 아니라 듣기”

토론자 선정도 중요하다. 걸핏하면 상대방의 말허리부터 붙들고 늘어지는 토론자는 기본 자질이 의심스럽다. “검열 검열 그러는데 심의와 검열의 차이를 아느냐”며 발언 중인 상대방을 힐난하는 토론자가 있는가 하면(〈갑론을박 동서남북〉의 ‘성인 영화 전용관 …’), “오히려 내가 그 입장에서 이야기해야 할 판이야. 무슨 소릴 하고 앉았어, 지금”하며 기본적 예의마저 망각하는 토론자도 있다(〈난상 토론〉 ‘장묘 문화, 이대로 좋은가’).

〈갑론을박 동서남북〉의 ‘성인 영화 전용관 …’에 출연했던 신기남 의원(국민회의)은 토론 중간에 “이거 국회하고 비슷한 것 같다. 목소리 크고 이야기 많이 하려는 사람에게만 자꾸 기회가 간다”라며 실소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는 나이나 지위로 권위를 내세우는 인습이 있어, 대화나 토론의 장에서 동등한 자격으로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습성이 배어 있다.

지난해 발족한 ‘한국 스피치 토론 클럽’ 김세곤 회장(고려소아과의원 원장)은 “토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이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토론자로 나설 자격이 없다. 그런 사람은 토론장에서 자기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른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최근 스티븐 보스워스 주한 미국 대사는 사석에서 한국에서는 어떻게 정책이 결정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한 적이 있다. 모든 정책이 투명하게 여론 수렴을 거치는 미국에 비해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공개된 토론의 장을 거치지 않고 ‘밀실’에서 흘러나온 정책 때문에 한국이 국제통화기금 체제를 피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본격적인 토론의 장을 열어 가려는 방송사들의 노력은 일단 그 자체만으로도 합격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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