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검은 색 옷이 거리 패션 주도한다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8.05.0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기 불황·다이어트 열풍 타고 ‘검은 옷’ 인기…‘단순미 좋아하는 세기말 심리’ 반영
몇년 전에는 검은 피부가 유행이었다. 랩·레게 같은 흑인 음악이 크게 히트할 즈음 구릿빛 피부는 ‘부와 아름다움과 젊음의 상징’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육체 자체가 패션의 한 요소로 등장하면서 검은 색 피부는 노출 패션을 통해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었다. 지금, 그 검은 색 유행이 피부를 감싸는 옷으로 옮겨왔다. 패션 리더들이 93년께부터 입기 시작한 검은 옷은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거리를 물들이는 가장 강력한 색채로 변모했다.

98년은 봄을 잃어 버렸다. ‘여름 같은 봄’을 불러들인 엘니뇨 현상으로 봄 기운을 느낄 틈도 없었지만, 거리 패션에서도 화사한 색감을 찾기가 어렵다. 검은 물결뿐이다. 봄을 맞기 직전 검은 색과 어울려 유행하던 베이지 색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검은 색과 같은 무채색 계열의 회색이다. 여름을 앞두고 의류업계가 잔뜩 기대하던 세계적인 유행인 파란 색 계열 옷도 눈을 씻고 찾아야 겨우 보일 뿐이다.

“지난해부터 한국도 검은 색에서 자연색으로 변화하고 있었는데 IMF 불황으로 인해 검은 색이 다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사회가 불안하면 거리의 색상은 어두워진다. 검은 색이 계속 유행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한국에서 15년째 컨설팅을 하고 있는 패션 전문가 다나베 히데노리 씨(주식회사 톰인터내셔널 대표)의 진단이다. 다나베 씨에 따르면, 사람들의 표정은 옷 색깔과 늘 함께한다.

패션의 역사를 보면, 검은 색이 전면적으로 도입된 것은 1920년대이다.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샤넬이 검은 드레스를 처음 발표했을 때 시각적인 충격을 주면서 눈길을 모았는데, 검은 색 드레스는 검은 색 포드 자동차와 나란히 화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저 블랙이 포드 자동차만큼 갈까?’ 그러나 포드 자동차가 디자인을 바꾸어 가며 지금도 세계 정상을 달리고 있듯이, 검은 색 의상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게다가 고급 승용차에서처럼 검은 색은 가장 고급스러운 색으로 대접 받고 있다.
박명희 교수(건국대·의상학)에 따르면, 옷에서는 일반적으로 세련된 색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검은 색만은 예외이다. “색상을 겹치면 겹칠수록 세련된 맛이 나는데, 검은 색은 가장 많은 색이 겹치는 색상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 발렌시아가가 50∼60년대에 검은 색을 사용하면서 검은 색은 우아하고 세련된 색상으로 절정을 맞았다”라고 박교수는 말했다.

이후 검은 색은 유행과 무관한 패션의 기본 색으로 자리잡았다. 새로운 색상이 아무리 유행해도 검은 색은 패션 매장에서 언제나 30% 비중을 차지했다. 예복으로든, 상복으로든, 일상복으로든 어느 자리에서나 잘 어울리는 색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검은 색은 하얀 색과 함께 고급 패션의 상징으로 자리잡으면서 변하지 않는 기본 색으로 기능해 왔다.

검은 색, 코디·재활용 용이해 실용성 만점

80년대까지만 해도 상복이나 교복에서만 보이던 검은 색이 90년대 들어 한국에서 각광을 받은 것은 이른바 ‘프랑스 마인드’가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전세계로 확산된 프랑스 마인드는 검은 색에서 무겁고 중후한 멋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련되고 귀여운 멋을 내는 경향이다.
한국에서 검은 색이 각광받은 큰 이유 가운데 하나로 다이어트 열풍과의 연관성을 빼놓을 수 없다. 90년대 들어 날씬하게 보이려는 욕망은 남녀를 불문하고 일종의 강박 관념으로 자리잡았는데, 검은 색은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색이다. 몸을 날씬하게 보이게 하는 데 가장 적합한 색상인 것이다. 서울 한 백화점의 여성 의류 매장에서 10년 넘게 근무해 온 한 직원은 조금 뚱뚱한 손님이 오면 앞뒤 가리지 않고 검은 색부터 먼저 입힌다고 말했다. “옷을 판매하는 최상의 전략은 날씬해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색깔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몸매는 날씬해 보인다. 검정색을 입히면 거부하는 손님이 거의 없다.”

사회 환경과 그로 인한 사람들의 심리는 옷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패션 심리 전문가들은 사회가 안정되면 가족·친구 등 주변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불안하면 개인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패션에도 그대로 반영된다고 지적한다.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면 우울증에다 담배나 커피가 자꾸 늘고, 정서가 안정되면 콜라나 사이다·주스를 좋아하는 것처럼 옷을 고르는 입장도 똑같다. 안정된 사회에서 밝은 색상이, 불안한 사회에서 어두운 색상이 유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나베 히데노리 씨의 말이다.

불안하고 우울한 심리가 검은 색 유행을 지속하게 하기도 하지만, 어려운 경제 사정이 검은 색을 계속 선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의류업계의 올해 매출액은 지난해와 비교해 40% 정도가 줄었다. 옷을 새로 사 입기가 어려울 때는 검은 색이 가장 유용한 색상이다. 다른 색과 ‘코디’가 잘 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무난한 색상이어서 그만큼 재활용에 적합하고 실용적이다.

이같은 경향은 매출 감소와 관련해 매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2월까지는 그런대로 여러 색상이 있었는데, 3월에 접어들면서 매장이 갑자기 검정색·흰색·회색으로 변해 버렸다. 블루 계통 색깔이 크게 유행하리라 예상했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다.” 서울 쁘렝땅백화점·대구 동아백화점 상품개발팀장인 김대권씨는, 상품을 판매하는 처지에서도 모노톤 계통이 가장 위험 부담이 적은 색상이라고 말했다.
대중의 색깔 감각 세련, 검은 색 유행에 기여

하지만 잘못 입으면 검은 색만큼 촌스러운 색깔도 없다. 단순함으로 멋을 내는 데는 수준 높은 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직 한국에서는 특정 브랜드나 유행에 휩쓸리는 경향이 있지만, 모노톤으로 멋을 부리는 수준이라면 옷과 색상에 대한 대중의 감각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최근의 경제 불황과는 관계없이 모노톤의 강세는 ‘단순한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과 맞물려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세기 말의 불안한 심리, 너무 복잡하고 여유가 없는 세상에 대한 반발 심리가 깨끗하고 단순한 색상을 선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임숙자 교수(이화여대·의류직물학)는 지난해 여름 거리 패션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검은 색 바지를 입은 남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몇년 전 배꼽티가 나왔을 때는 머리 스타일이 헝클어지고 복잡했었는데, 지금은 머리 스타일도 매우 단순해졌다. 단순함에 대한 취향은 결국 복잡한 게 싫다는 심리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성물산패션연구소 서정미 수석연구원에 따르면, 외국에서도 세기 말의 어수선한 상황을 반영하고, 새로운 세기를 깨끗하게 맞이하자는 의도로 컬러를 없애는 경향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다 경기 불황까지 겹친 한국에서는 거리의 검은 색 풍경이 한동안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새로운 유행 색상이 등장하더라도, 소비자들은 그것으로 약간의 변화만 줄 뿐 검은 색을 기본으로 하는 재활용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