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워싱턴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
  • 이종숭 (미술 평론가) ()
  • 승인 1995.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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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한국전 참전 기념물… 고난의 모습 묘사해 전쟁에 명분 부여
지난 7월27일, 휴전 42년째가 되던 날, 김영삼 대통령의 미국 공식 방문에 맞춰 제막식을 가진 워싱턴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에 대한 각종 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그것은 ‘한국 전쟁의 역사적 의미 재평가’라든가 ‘잊혀진 전쟁, 42년 만에 되살리다’ 등 주로 한국전의 역사적 조망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기념 조형물 자체보다는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조형물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찍은 ‘기념 사진’이 주로 소개되고 있어서, 그 기념 조형물은 아직 조형물 자체로서의 언어를 내보내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 언어가 들리지 않고 있다. 그 기념 조형물에는 미국 행정부의 정치적 언어, 한·미 관계가 빚어내는 외교적 언어가 덧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두 대통령의 ‘기념 사진’은 마치 전선을 시찰나온 정치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리하여 말이 없는 병사의 표정은 매우 시사적이다.

현장에서 직접 보지 못한다는 한계를 무릅쓴 채, 사진으로나마 정치 외교적 ‘포장’을 뜯어내고 조형물 자체를 직시해 보기로 한다.

“힘과 아름다움 조화”

이 기념 조형물은 군인 19명의 조상(彫像)과 벽화, 그리고 비명석과 ‘기억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다. V자 형태를 하고 있는 지면 위에는 미군 병사 19명이 성조기를 향해 산개하여 행군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m20cm 안팎의 높이로 실제보다 약간 크게 만들어진 그 조상들은, 각자 취하고 있는 자세가 다르며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대단히 사실적인 모습으로 만들어진 이 조상들은 백인·흑인·히스패닉계 미국인들로서, 육군 15명, 해병 2명, 해군 위생병 1명, 공군 관측병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은신처에서 나와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긴장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군인상의 배경에는 약 50m의 검은 화강암 벽화가 서 있다. 그 위에는 컴퓨터로 합성한 수천의 얼굴들이 에칭(부식) 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이 얼굴 모습들은 약간 떨어져서 보았을 때, 한국 산의 부드러운 능선을 상기시킬 정도로 독특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 벽화의 끝부분에는 비명이 새겨진 커다란 화강암 석판이 존재하는데, 이 위에는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국민을 지키라는 조국의 부름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기린다’는 장엄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또 비명석과 성조기 아래에는 검은 화강암 바닥에 휘돌아 흐르는 물을 담은 ‘기억의 연못’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조형물 전체에 유려한 액센트를 가하고 있기도 하다. 이 연못의 물 표면에는 군인상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비친다.

2차 세계대전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두 국지전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이 달라서일까.

5만4천명의 전사자를 낸 한국전은 그들에게 사실상 ‘기억하기 싫은 전쟁’ 혹은 ‘잊혀진 전쟁’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전해지지만, 명분 없는 전쟁을 치르고서도 사실상 패전으로 확인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응과는 확연히 다르다. 베트남 참전 기념비는 전몰자들에 대한 진혼과 슬픔의 의미를 조형적인 측면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미니멀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그 반면에 ‘아름다움과 힘이 조화를 이룬 걸작’이라고 외신이 전하고 있는 이번 한국전 참전 기념비는, 명분 있는 전쟁에서 보여준 미군의 진취적 기상을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방법은 극히 사실적인 조형어법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삼성과 현대 등 한국측 기업이 제공한 3백만달러를 포함해서 총 1천8백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재원이 들었다는 이 기념 조형물은, 보통의 전쟁 기념물이 보여주는 영웅주의의 모습은 크게 부각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만한 돈을 들여서 전쟁 기념 조형물이 아닌 평화를 상징하는 기념 조형물이 만들어졌더라면 훨씬 이야기거리가 많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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