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의 아리랑은 '소설 반민특위'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5.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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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씨 <아리랑> 전 12권 완간 … “친일파 척결은 아직도 과제”
붓을 놓고 눈을 드니, 창 밖은 8월이었다. 그것도 여느 해 8월이 아니었다. 광복 50주년의 8월. “긴 감옥살이였다. 그러나 아직은 가출옥이다”라고 작가(52)는 말했다. <아리랑> 5년, <태백산맥> 10년. 15년 동안의 글 감옥살이였다. 작가는 우리 민족이 잊고 있는, 혹은 잃어버리고 있는,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친일파의 언어로 왜곡돼 있는 민족사의 한 장엄을 찾아 나섰다.

‘할 수 있다’는 현수막과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차단기를 설치해놓고 뒤보다는 앞, 과거보다는 미래가 유일 선이라는 ‘합의’가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을 때 작가는 해방 공간과, 20세기 초엽 구한말로 포복해 갔다. <태백산맥>도 그러하지만 <아리랑>의 뒤돌아보기는, 그러나 끝끝내는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자는 것이었다.

지난 7월25일 새벽 1시 25분. <아리랑> 열두 권의 대단원을 마치고, 작가 후기를 쓰면서 작가는 무엇보다도 친일파 문제와 역사 복원, 그리고 통일을 향한 염원에다 또렷한 방점을 찍었다. 대하 소설 <아리랑>의 밑뿌리는 다름 아닌 친일파 척결이었던 것이다. 친일파에 대한 작가의 적개심은 그가 국민학교 6학년 사회 시간부터 품어오기 시작한 것이었으니, 모두 열두 권에 달하는 이 대하 소설에는 작가의 문학적 생애가 실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리랑>은 문학의 역사적, 정치·사회적 역할을 새삼 돌올하게 한다. 그것은 문학의 임무이자 권리일 것인 바, 조정래씨는 “<아리랑>은 문학이 세운 반민특위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정과 부실의 원인은 친일파들의 득세였다. 브레이크가 없는 대형 붕괴 사고, 대형 비리의 뿌리를 천민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견해에 동의하지만, 그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천민자본주의의 토양이 바로 친일파라는 것이다. 그의 어조는 더욱 단호해진다.

“반민족행위자 처리 특별처벌법을 제정하자고 하면 나보고 시대착오자라고 비판할 것이다. 작가로 나선 직후인 70년대에 나는 ‘촌놈’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내가 친일파를 척결해야 한다고 말하면 문단 선배와 동료들은 나를 비웃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나 프랑스를 보라. 반민족 행위에는 공소 시효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아리랑>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작가 노트에 쓴 다짐

그는 해묵은 대학 노트 한 권을 펼쳤다. <아리랑>의 설계도. 부와 장의 구분에서부터, 등장 인물들의 계보, 줄거리는 물론 매일매일 써나간 원고 장수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집필 설계도 맨 앞에는 빨간 펜으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36년 동안 죽어간 우리 민족의 수가 4백여만! 2백자 원고지 2만 장을 쓴다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얼마인가!’

2만 장에 들어가는 글자 수는 얼추 3백여만 자다. 일제 강점기에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다 적기에도 모자라는 분량이다. 펜을 꾹꾹 눌러 써내려간 <아리랑>의 한 글자 한 글자는 저 4백여만 명을 위한 진혼이었다. 위궤양과 세 번씩이나 싸울 때, 마비된 오른팔에 침을 꽂을 때, 두 다리가 퉁퉁 부어올라 움직일 수 없을 때, 소설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을 때, ‘이건 인생이 아니다!’고 도망치고 싶을 때, 그때마다 저 붉은 자필을 떠올리며 원고지 앞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쓰여진 <아리랑>은 모두 4부로 나뉘어 1904년 여름 징게맹갱 외미엣들(김제 만경 평야)에서 1945년 8·15 직후 광복의 기쁨도 잠시, 귀향길에 중국인들로부터 습격 당하는 장면까지 대하를 펼쳐나간다. 각계 각층의 등장 인물 천여 명은 군산과 김제를 중심으로 하와이·미국·중국·연해주와 러시아·일본·동남아 등지를 넘나들며 한국 문학사상 가장 광대한 소설 공간 속에서 명멸을 거듭한다.

전남 벌교와 지리산을 주요 무대로 했던 <태백산맥>과 달리 <아리랑>은 작가의 ‘발’을 요구했다. 그 현장들을 직접 둘러보지 않고는 쓸 수 없었다. 90년 1월 일본 홋카이도를 시작으로 작가는 한민족의 피어린 ‘수난사 지도’를 온몸으로 작성했다. 중국 두 차례, 일본 세 차례, 동남아 세 차례, 러시아 두 차례, 미국 세 차례…, 지구를 세 바퀴 돈 거리였다.

“현장에 가면 다 있다”고 작가는 말했다. 대하 역사 소설, 그것도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에 짓눌려 ‘압사’한 민족사를 복원하는 소설에서는 정확성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상상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동포들이 스러져간 산하에서 구두끈을 맬 때마다 소설에 대한 각오가 새로워졌고, 소매를 부여잡고 눈물짓는 늙은 동포들의 육성에서 당시의 비극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북만주의 오지. 그곳에서 그는 정읍 땅에서 집단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이룬 마을을 보았다. 낮게 엎드린 초가집들. 그러나 세칸짜리 학교만은 붉은 벽돌로 단단하게 지어놓았다. 동포들이 살아온 자취를 더듬으면서 그는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만주뿐이 아니었다. 하와이 파인애플 농장, 중앙아시아의 집단농장에서도 그의 가슴은 더워졌다.

친일파 척결 문제 못지 않게 그가 이번 소설에서 비중을 둔 것이 식민지 시대 민족해방운동사였다. “남과 북 분단 정권들이 서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만을 고집해 왔다. 통일이 되면 분단 역사는 의미가 사라지고, 대신 그동안 의도적으로 한쪽만을 부각해온 36년 간의 항일 무장투쟁사가 큰 의미로 떠오를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는 그렇게 대립만 하지 않았다. 손을 잡기도 했다. 이념·종교·신분이 어떻든 민족의 독립이 유일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통일의 한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라고 작가는 말했다.
역사에 목마른 독자들

작가에 따르면, 학자들은 정직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항일 무장투쟁사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신간회를 기점으로 연합 전선을 폈다. 동북항일연군이 그 대표적 증좌다. “광복 이후 김 구가 38선을 넘을 수 있었던 것도 항일 무장투쟁사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역사는 대립만을 기술하고 있다. 무서운 역사 왜곡이다”라고 작가는 말했다. 결국 <아리랑>은 학자들을 대신한 것이다. “항일 무장투쟁사를 정확히 복원하는 것이 통일의 대전제”라는 작가로서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그는 민족주의를 말한다. 민족주의란 말에는 아직도, 아니 지금 특히 오해가 많이 따라붙는다. 그의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와 대립하는 민족주의가 아니다.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까지 창조적으로 포괄하는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조정래씨는, 제 3세계는 제 3세계의 자존심과 긍지, 주체의식을 확립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재독 학자 송두율 교수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렇다고 <아리랑>이 거대 서사만의 대하 역사 소설은 아니다. 민족 생활사의 ‘세밀화’이기도 한 것이다. 눈깔사탕은 언제 들어왔고 휘파람은, 팔자 콧수염은, 고무신은 언제, 왜 유행되기 시작했는지까지를 <아리랑>은 곳곳에서 일러준다. ‘궐련에 맛들려 서마지기 논 팔아먹고, 남폿불 호사에 초가삼간 살라먹을 놈’이라는 속담이 ‘재생’되는 것이다. 이 변화는 단순한 풍속이 아니라 식민지 체제, 즉 제국주의를 통한 세계 자본주의로 편입되던 당시 민족 경제가 수탈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인물은 철저하게 허구로 했다. 그 허구 속에 삶의 고뇌와 진실, 그리고 생활의 구체성을 살렸다. 총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을 많이 등장시키되 역사적 사실과 인물은 짧고 분명하게, 그리고 배경이 되도록 처리했다. 그리고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대목, 괴로움으로 폭발할 것 같은 장면에서는 철저하게 작가의 개입을 배제했다. 작가가 먼저 울면 아무도 울지 않는다. 수식을 거의 없애고 단순 명료한 문장을 구사했다. 그래야 감동이 독자의 몫이 된다.”

지금까지 <태백산맥> 4백만 부, <아리랑> 1백20만부가 팔린 것으로 알려진다. 작가의 궁극의 보람은 독자들이다. “내 소설은 기적이 아니다. 필연이다. 그렇다고 나의 작가적 역량이 뛰어나다는 말이 아니다. 역사에 대한 목마름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라고 조정래씨는 말했다.

잠시 쉬고 나면 그는 자신의 문학적 생애의 후반기를 위해 다시 글감옥에 들어간다. 휴식 기간에도 할 일은 많다. 우선은 일본 번역문학가들을 데리고 지리산 일대를 답사해야 한다. 일본 출판 문화를 대표하는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집영사가 <태백산맥> 일어판을 곧 펴내는데 일본인 번역자들이 그 무대를 둘러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프랑스에서 들어온 <아리랑> 불어판 출판 제의를 검토하는 일과, 그동안 미루었던 강연회 등이 남아 있다.

문단에서는 작가 조정래를 두고 ‘지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대하 역사 소설 한 편을 가지기도 드문데 그는 두 편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둘 다 독자들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받고 있다. 게다가 70~80년대 운동사를 다룸으로써 한국 근·현대사 3부작을 완성할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아리랑> 완간을 두고 가출옥이라고 말한 것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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