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 김용옥 (철학자·한의사) ()
  • 승인 1997.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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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이트헤드학회 창립…동양적 우주론과 교통 모색
지난 3월29일, 연세대 백주년기념관, 오후 2시, 철학·수학·물리학·의학·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조촐한 모임이었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들을 강인하게 묶고 있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화이트헤드! 그는 1861년 2월15일 영국의 램스게이트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그리고 1947년 12월30일 하버드 대학 야드에서 멀지 않은 작은 아파트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이름을 우리말로 옮기면 백두(白頭), 19~20세기, 인류사에서 가장 소요가 컸던 양세기의 여울목을 살았던 그의 삶은 우리 민족의 백두대간과 시공을 초월한 혼의 교류라도 있었을까? 한국화이트헤드학회 창립을 축하하는 연세대 철학과 박순영 교수의 코멘트다.

한국화이트헤드학회 창립과 때를 맞추어 화이트헤드 철학을 우리말로 옮기는 데 평생을 진력한 오영환 교수의 역저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 경험>(통나무)이 출간되었다. 화이트헤드 형이상학 3부작이라고 불리는 <과학과 근대 세계> <과정과 실재> <관념의 모험>을 모두 번역한 후에 화이트헤드의 시간관을 전문으로 다룬 연구서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눈길을 끈다. 연구에 앞서 번역을 통해 한국 독자들에게 원전의 정보를 공유하게끔 하는 지적 행위야말로 우리 학계의 가장 절실한 요청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근거로 환자 몸에 바늘을 찌르는가

기(氣)란 무엇인가? 기란 실제로 있는 것[實在]일까? 아니면 관념적인 픽션일까? 기는 신비적인 어떤 힘인가?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실재적 우주를 구성하는 단순한 물리적 단위일까? 그렇다면 리(理)란 또 무엇일까? 기와 리는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은가? 우리의 선조 이퇴계와 기고봉이 평생을 두고두고 서신을 왕래하면서 논쟁을 벌였던 리기론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영원한 제국’의 한 이론적 계기였을까? 그것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이해할 때 가장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나 도올은 현직 의사다. 나는 매일 나의 클리닉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침을 놓고 천연물[本草]로 방제 구성된 약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침이라는 것은 인체상에 보이지 않는 어떤 선(線)으로 가정된 경락(經絡)이라는 지점(locus)에 바늘을 찌르는 행위다. 과연 환자들의 신체에 마구 바늘을 찔러도 되는 것일까? 현대 의학도의 처지에서 보면 참으로 무지막지한 짓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이러한 무지막지한 짓을 어떠한 이론적 근거 위에서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현대 학문의 기초의 모든 성실한 훈련을 거쳤다고 할 나는 과연 어떻게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나의 지적 결백성을 고수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한번 묻는다. 경락은 기(氣)라 해야 할까? 리(理)라 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 범용한 한국의 지적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이러한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또 하나의 우주, 우리가 여태까지 기존의 모든 학문 체계에서 흔히 접해 왔던 우주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우주, 그 우주를 말하지 않으면 아니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우주를 말하는 작업을 철학도들은 흔히 형이상학(metaphysics) 혹은 우주론(cosmology)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는 연구자만 있을 뿐 철학자는 없어

많은 사람이 형이상학을, 인식론이나 윤리학이나 논리학이나 미학과 같은, 철학의 한 분과 학문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형이상학은 철학의 한 분과가 아니다. 형이상학이야말로 철학의 본령이며, 그 자체가 바로 우리 사변 이성의 극대치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반형이상학도 결국 어떤 하나의 형이상학적 인식론 위에 기초하고 있을 뿐이다. 흔히 철학을 리어왕의 신세에 비유한다. 리어왕이 딸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준 것처럼, 제반 분과 과학에 그 영역을 빼앗기고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이렇게 제반 분과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철학의 본령은 매우 명백해진다. 바로 이러한 제반 분과 과학의 모든 성과를 통합하는 새로운 우주 건설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철학을 인류 문화에 존속되어온 기존 사유 체계의 이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것은 연구에 불과한 것이며 철학이라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연구자들만 있고 철학자가 없는 것이다. 철학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지는 사물들에 대한 일관된 이해 방식을 획득하려는 노력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관심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는 근원적 신념들을 명료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해 방식이 설사 기존의 완결된 체계들보다 불충분하거나 못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이해 방식을 구성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철학!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의 창진(creative advance)이다. 그 궁극은 우리의 지식과 정서와 느낌의 모든 관계를 통합하는 하나의 새로운 우주 건설인 것이다.
제자 버트런드 러셀과 수학책 펴내기도

20세기는 과학의 세기다. 과학을 산출한 서유럽의 계몽주의 문명에 지구상의 전문명권이 굴복한 세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과학을 산출한 서양의 지성사는 과학적 인식에 토대한 강력한 반형이상학의 돌풍을 일으켰다. 그들은 모든 관념의 허구성을 무너뜨리려고 힘썼다. 이러한 20세기 반형이상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로 그 반형이상학의 본령인 과학에 기초하여 새로운 우주를 건설한 역설적 철학자가 바로 화이트헤드다. 우리에게 친숙한 버트런드 러셀은 화이트헤드의 제자였다. 이들은 수학자였고 <수학의 원리>라는 대작을 공저했다.

허나 화이트헤드는 인류사의 비극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으면서(친아들 에릭이 전사) 형이상학으로 그의 관심을 옮긴다. 말년에 하버드 대학 철학교수로 초빙되어간 13년 세월 동안 인류의 모든 지혜를 집대성한 새로운 우주를 건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우주에는 우리에게 아주 생소한 언어들이 등장한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 위해 그는 그의 모든 철학적 개념을 신조(新造)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핵에 놓인 말이 바로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라는 말인데, 나는 이 현실적 계기라는 화이트헤드의 용어야말로 20세기 인류의 언어 중에서, 동양인이 건설하려 했던 ‘기’라는 건축물을 가장 정확히 서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라고 생각한다.

체질의학 체계와 이어질 수는 없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는 바로 이 현실적 계기의 순간적 생멸(生滅)로 설명되며, 그 생멸의 관계를 그는 생성(becoming)이라고 부른다. 그 관계의 복잡한 존재론적 방식을 설명하는 데 <과정과 실재>라는 방대한 서물이 바쳐진 것이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생멸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실재로써 설명되며, 그것은 베르그송의 물리적 시간과 순수지속으로서의 이원적 구분을 허용할 수 없는 포괄적·일원적 실제다. 동양적으로 말한다면 시간도 기(氣)의 합생(合生)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나의 현재적 관심은 침을 지배하는 몸의 기(氣)의 원리를 창안하여 새로운 우주를 건설한 동호 권도원 선생의 체질의학 체계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이 어떠한 대화의 통로를 모색할 수 있느냐에 쏠려 있다. 철학은 어떠한 생각이 비록 상식에 위배된다 할지라도 그것에서 하나의 새로운 우주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그것을 일관되고 치밀한 인식의 체계로 설명하려는 창조적 작업이라는 화이트헤드의 권유를 우리는 여기서 또다시 망각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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