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작가들, 평양에서 ‘뜨거운 포옹’
  • 김형수 (시인·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 ()
  • 승인 2004.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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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작가대회 성사시킨 실무협상 대표 기고문
남측의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북측의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는 지난 6월8~10일 금강산에서 대표 협상을 갖고, 8월 하순 평양에서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기 위한 민족작가대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지금까지 남측 실무협상단을 이끌어온 김형수씨의 기고문을 싣는다.

내가 북한 작가들을 처음 만난 것은 2001년 6·15 공동선언 1주년을 기념하는 금강산 토론회였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남북 문인 4인 중 한 사람으로 ‘김정숙휴양소’에서 각급 대표자들 틈에 끼어 있었다. 누군가 강한 북쪽 억양으로 말을 건넸다.

“동무, 눈빛이 시(詩) 쓰겠습네다.”

직감적으로 ‘문학적 치열성’이 느껴져 고개를 쳐들었다.

“하긴, 마흔 살 넘어서 쓴 게 시겠습네까? 시란 고저 스무 살 때 써야 진짜겠디.”

내 이름표의 생년월일을 보고서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연이어 떠드는 “저 동무는 자유주의 왕초라요”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유주의? 바람둥이를 뜻하는 말이란다. 그래, 우리 일행 하나가 감격에 겨워 호기심을 보였다.

“남에서는 모텔이다, 여관이다 해서 바람피울 장소가 많은데 북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고저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습네다.”

분단 체제도 바꾸지 못한 문학인의 기질

아,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 때의 대화들은 분단체제가 결코 문학인들의 기질을 바꾸지 못했다는 반증으로 지금도 내게 메아리친다.

그 후 3년 만인 지난 5월5~7일 금강산에서 다시 실무회담이 이루어져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때 나는 북측 대표에게 “단장 선생님!”이라 하지 않고 “형님!”이라 했다. 귀측? 이런 말은 입술에 붙지 않는다. 내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이 된 후 첫 이사회에서 여섯 자리 이상의 수를 읽지 못해 줄이 바뀔 때마다 일, 십, 백, 천… 하고 다시 세었다는 말을 듣고 배가 자지러지도록 웃는 사람들. 적어도 사무총장이 사무에 서투른 것을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은 남북을 통틀어 작가들밖에 없다.

그런 이들끼리 만나는 것을 두고 왜 민족사의 한 획이 바뀌는 지점이라고 열변해야 하는가? 고백하건대 우리는 최하 반 세기가 넘는 세월을 차 타고 세 시간 이상을 무사 통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 철책을 만나거나 초소를 만나거나 검문소를 만났다. 이른바 분단의 경계이다. 한국인들은 만취한 상태에서도 그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는다. 무의식의 저 깊은 곳, 상상력의 저 깊은 곳까지 동강 나 있는 것이다.

오는 8월 하순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작가대회는 바로 그것을 깨뜨리는 자리가 될 것이다. 물론 우리도 평양에 가면 주체사상탑에 오르고 만경대 생가를 방문할 것이다. 남측에서 기피하는 이 명승지들을 돌면서 누군가는, 6·3 빌딩과 용인 민속촌 같은 것이라고 관광학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북에서는 대학 이름이나 도시 이름도 항일무장투쟁사를 기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남측도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이름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다. 6·15 선언이 있고 나서 북에서 첫 손님이 왔을 때 묵은 곳이 ‘워커힐 호텔’이었다. 어떻게 설명해도 워커 장군이 전투했던 언덕을 기념하는 호텔로 들어가야 하는 북의 굴욕감은 컸을 것이다.

만일 양측 작가들이 만난다면 엄청난 양의 폭주와 유행가와 음담패설이 쏟아질 것이며, 그 무질서의 틈새로 체제 너머의 표정들이 드러날 것이다. 아직 취기가 묻은 얼굴들이 백두산 정상에 올라 해돋이를 기다리며 시 낭송을 하고 ‘문학의 새벽’을 열 때 민족사의 상상력이 깨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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