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도량 해인사가 소란하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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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판 대장경 제작 등 대형 불사 잇달아 추진…자연환경·문화재 훼손 우려
지난 6월18일 아침. 경남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주지 세민 스님) 경내에는 한결 맑은 기운이 감돌았다. 밤새 비가 내린 터였다. 결제 기간이어서 경내는 젊은 스님들로 붐볐다. <고려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에는 평일 아침인데도 몇몇 관광객이 있었다. 13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자체가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장경각을 한바퀴 돌아 나오는데 희미하게 기계 소리가 들렸다. 북쪽 담장 너머였다. 소리 나는 데로 가보았다. 해인사 율원 바로 위편의, 종정 스님 처소(내원암) 건립을 두고 요즘 문화재 훼손 논란에 휩싸여 있는 바로 그 자리였다. 굴착기가 폐건축재를 트럭에 싣고 있었다. 벌써 공사가 시작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순간 긴장했다.

장경각과 직선 거리로 200m쯤 떨어진 곳이다.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 500m 이내 지역에서는 어떠한 형태 변경도 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알아보니 공사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절의 폐건물 잔해를 임시로 쌓아두었다가 마침 이 날 치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문화재청과 환경부의 최종 허가가 나면 이곳에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될 것이다.

요즘 해인사의 움직임이 수상하다. 내원암만이 아니다. 절 입구에 대규모 신행문화도량이 들어설 예정인데, 이 지역 또한 자연환경보존지역이자 문화재보호구역이다. 해인사는 지난 3월 문화재현상변경 신청서와 공원 내 행위 허가 및 공원계획 변경 신청서를 작성해 합천군과 가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 각각 제출했다. 현재 이 서류는 경상남도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을 거쳐 문화재청과 환경부에 넘어가 있다. 6월 말로 예정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와 환경부 공원위원회 심의를 통과하면 즉시 착공이 가능하다. 주지 세민 스님은 6월3일 환경부장관을 방문해 정부 차원의 협조를 요청해놓은 상태다.

대형 불사의 조짐은 지난해 10월 동판 대장경 제작을 기획하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8개월 동안 전문가 13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 검토를 거친 뒤, 기존 <팔만대장경> 8만1천2백58장에 국내 역대 큰 스님들의 저술을 더해 약 9만여 장에 달하는 ‘<21세기 신 대장경>’을 2006년 5월까지 만든다는 계획안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지난 5월17일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동판 <팔만대장경> 봉정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법전 종정과 법장 총무원장을 비롯한 조계종 원로들과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 등 정·재계 인사 3천여 명이 참석했다.

동판 대장경은 사진동판 개발 업체인 서울 강남구 신사동 우연엠에스(대표 심우열)가 염기성 특수 약품을 이용해 인청동 표면을 부식시켜 글자를 새겨 넣는 기법으로 제작된다. 대장경 서체는 대장경연구소(소장 종림 스님)가 표준체로 정한 ‘폰트체 정자본’이 사용된다. 해인사는 완성된 대장경 한 질을 새로 건립될 장경법당에 안치하고, 다른 한 질은 북한에 기증하며, 나머지 한 질은 모금에 참여한 일반 신도들에게 나누어줄 계획이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해인사 팔만대장경 동판복원불사 개요’에 따르면, 대장경 불사에 소요되는 예산 규모는 총 8백억원에 달한다. 해인사 1년 예산이 30억원이 채 안되는 것에 비추어 엄청난 액수다. 해인사는 1인당 100만원씩 8만명에게 시주를 받아 경판 제작에 3백80여억원을 지출하고, 남은 돈은 신행문화도량 건축비(2백억원)와 장경법당 건립비(50억원)로 사용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해인사는 ‘브랜드 쿡’이라는 홍보기획 회사와 이미 계약을 맺었고, 농협 창구를 이용해 대대적인 모금에 나설 작정이다. 해인사 종무소는 이런 내용이 담긴 문건을 지난 5월 임회(해인사 최고 의결기구)에 제출했다. “산중에 초대형 관광시설 들어서는 꼴”

하지만 동판 대장경 조성에 대한 불교계 안팎의 여론은 그다지 좋지 않다. 인경(印經; 경전을 찍어냄)을 위한 것이 아닌 단순 보관용인 데다 문화재적 가치도 없어 불사를 일으킬 만한 합당한 이유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은 13세기 중반 몽골의 침탈에 맞서 국난 극복과 민중의 항쟁 의지를 끌어내고자 하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제작 기간만 16년이 걸린 국가적 행사였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3보1배라는 단어도 원래 ‘세 번 절하고 한 글자씩 새겼다’(3배1자)는 말에서 나왔을 정도로 대장경 불사는 불교 수행에서 큰 의미를 인정받아 왔다.

고려 시대에는 이외에도 여러 차례 대장경 불사가 있었다. 이 전통은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끊겼다. 숭유억불 정책 탓에 대규모 불사를 일으키기가 어렵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목판이 훨씬 간편한 금속 활자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고려대장경>을 모본으로 19세기 중반에 제작된 일본의 <신수대장경>이 금속 활자본이다. 그리고 현재는 컴퓨터 시대이다. 수년 전 대장경연구소는 <고려대장경>을 CD에 담는 전산화 작업을 마쳤다.

하지만 후발 주자인 일본의 <신수대장경>이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어 연구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국내의 <팔만대장경> 연구 수준은 미미한 편이다. 동국대 역경원이 번역을 마쳤지만 주해 작업은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해인사 출신인 한 스님은 “지금 필요한 것은 대장경 모조품을 만들어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팔만대장경> 원본을 제대로 보존하는 방법을 강구하면서 연구와 보급에 힘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동판 대장경 조성 불사는 딸린 사업까지 범위를 확대해보면 훨씬 심각한 부작용을 안고 있다. 해인사는 대적광전에서 직선 거리로 1km 떨어진 절 입구에 동판을 안치할 새로운 전각을 세우기 위한 불사를 계획하고 있다. 이른바 신행문화도량이다. 3년 전 청동 대불을 세우려다가 말썽이 났던 바로 그 자리이다.

설계를 담당한 조성룡 도시건축이 작성한 ‘해인사 개산 1200년 기념 해인사 신행·문화 도량 건립사업 계획 설계 보고서’에 따르면, 8천6백27평 대지에 연건평 4천5백59평 규모로 들어설 신행문화도량은 장경법당·염불당·참선동·요사채·출가 체험관·일반인 숙소·대형 지하 주차장 등 10여 동으로 구성되며, 철근 콘트리트조와 철골조, 목구조 등이 혼합된 최첨단 건물이다. 웬만한 사찰 규모를 넘어서는 초대형 시설이 산중에 들어서는 셈이다.

환경단체들은 신행문화도량이 들어설 경우 자연 환경과 문화재 훼손이 염려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환경단체들은 또한 이 시설물이 대규모 관광시설로 변질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신행문화도량의 관광지화 가능성은 이미 주지 세민 스님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세민 스님은 지난 2월15일 조성룡 도시건축 관계자들과 함께 현장을 답사하는 자리에서 “신행문화도량은 관광객을 위한 곳이다. 대장경판을 모신 곳이기 때문에 관광객이 많이 올 것이다. 이곳은 지극히 기능적인 곳이기 때문에 기능적인 편리함이 중요하다”라면서 그에 맞는 설계 변경을 강조한 바 있다.

해인사 소속인 한 스님은 “신행문화도량이 완공되면 평균 상주 인원이 3백명에 달할 것이다. 그럼 해인사에서 직접 관리하기가 어려워 외부 업체에 운영을 위탁하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신도들의 참선 수행 공간보다는 관광 숙박 시설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해인사 소속 스님들과 환경단체의 항의로 이미 폐기된 국도 59호선 확장 계획이 다시 추진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런 비판에 대해 해인사측은 “이곳은 해인 초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일반 상가와 노점상이 점유하고 있는 나대지이며, 신도들의 수행과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별다른 자연 훼손은 없을 것이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동판 대장경 조성에 따른 불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내원암 건립 계획도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해인사는 최근 가야산국립공원사무소에 토지 등기부등본과 건물배치도 등을 첨부한 행위허가협의 검토의견서를 제출했다. 이에 따르면, 내원암 부지 2천8백66평에는 종정 스님 처소, 법당과 식당을 겸한 2층 건물, 요사채, 누각 등 건물 4동이 연면적 4백여 평 크기로 들어설 계획이다. 누각 옆에는 차량 10대를 세울 수 있는 주차장도 조성된다. 이 공사에는 모두 36억5천만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수행 분위기 해치고 개발 이익만 좇아”

이 계획에 대해 불교 환경단체에서는 국립공원 안의 사적지 훼손을 우려하면서까지 종정 스님의 암자를 지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종정 스님은 현재 머무르고 있는 해인사 퇴설당 이외에도 김천 수도암 등 전국에 걸쳐 몇 군데 처소를 두고 있다.

해인사는 지금껏 가야산의 자연 생태 보존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절 안에 가야산환경위원회 사무실을 두고 있으며, 해인사 스님들이 활동의 주축이 되어 왔다. 해인사는 그동안 가야산 국립공원을 관통하는 국도 59호선 확장 반대와 국립공원 내 골프장 건설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그랬던 해인사가 3년 전 청동 대불 건립 시도에 이어 이번에 또다시 환경 훼손과 문화재 훼손이 우려되는 거대 불사에 나서고 있는 상황은 다분히 모순적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현재 해인사의 대형 불사들은 자연환경 훼손은 물론 총림의 수행 분위기마저 저해하고 있다.” 경내에서 만난 한 스님의 말에서 해인사 소속 젊은 수행자들의 고뇌가 느껴졌다. 한편 불교환경연대 등 17개 불교계 단체는 6월21일 기자회견을 열고 해인사가 추진중인 대형 불사를 재고해줄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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