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영 칼럼]용서받지 못할 '폭력의 정치'
  • 번역·김주환(미국 보스턴 대학 교수·언론학) ()
  • 승인 1998.03.0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군이 중국 민간인 35만명을 살해한 남경 대학살의 특별한 점은 살인과 강간이 ‘유희적 행위’로 변해 버렸다는 데 있다. 이 추악한 사건은 결코 잊혀서는 안된다.”
필자는 지난 번에 약속했던 텍스트로서의 몸의 해석에 대한 칼럼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번에는 보다 더 긴급한 문제를 이야기해 볼까 한다. 긴급한 문제란 다름 아닌 ‘남경 학살’인데, 이는 37년 12월13일 장제스(蔣介石) 지배 아래서 중국의 수도였던 남경을 일본군이 점령한 후 6주 동안 민간인 35만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남경 대학살은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몸의 정치’에서도 결코 용서될 수 없는 사건이다.

필자는 지난 연말 재미 중국계 언론인 아이리스 챙이 쓴 <남경의 강간>을 구입해서 읽어 보게 되었다. 챙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일본군의 ‘인민 학살’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했다. 폭력에 대한 필자의 뿌리 깊은 혐오감을 다시 한번 자극하는 이 사건이 유별나게 독특한 점은, 살인과 강간이 ‘유희적 행위’ 또는 ‘장난’으로 변해 버렸다는 데 있다. 일본인들은 살인 행위를 잔치로 여겨 그 흥에 겨워했으며, 그 와중에 머리 베기 대회가 열려 두 일본군이 각각 1백5명과 1백6명을 살해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남경의 강간>에는 한 중국 여인이 강간당한 후 음부가 칼 같은 도구에 찔리는 것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부분이 있다. 몇몇 피해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더 박탈당해서 일본군의 기념물이 되는 포르노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이 거대한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은 일본의 승리, 즉 ‘떠오르는 태양의 등극’을 축하하면서 남경 국수를 준비하기도 했다.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과 마찬가지로, 남경 대학살은 일본의 ‘인종주의’에 기인한다. 일본군은 중국인을 비인간적인 ‘돼지’라고 불렀다. 심지어 어떤 일본군 병사는 남경에 주둔하면서 쓴 일기에서 ‘돼지는 먹을 수 있지만 중국인은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돼지가 중국인보다 더 값어치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경의 강간에서 가장 추악하고도 음흉한 측면은 일본인들이 이를 ‘조작’이라고 부인하는 일이다. 이는 한국인 종군 위안부를 ‘돈에 눈이 먼’ 공인 매춘부라고 주장하면서 이들을 성의 노예로 이용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피해자에게 수치감을 주고 ‘체면을 잃게’ 만드는 심리 작전이기도 하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정말로 격노케 만드는 것은, 일본이 교과서 검열이라는 공식적이고도 교묘한 방법으로 그러한 정보를 자국민과 차단한다는 데 있다. 와세다 대학에서 일본사를 가르치는 호라 토미오 교수는 66년에 중국을 방문한 후 남경 대학살을 확인하고 몇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그는 일본 내에서 엄청난 반발과 거짓으로 사건을 조작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폭력 안에는 공포가 존재하며, 남경 대학살이라는 특별한 사건은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된다. 전쟁이란 ‘또 다른 수단을 동원하는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클라우제비츠의 주장은 결코 진리라고 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논쟁의 여지가 있는 아이디어에 불과할 따름이다. 필자는 대학 1학년 때 위대한 철학자 화이트헤드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문명이란 설득이 폭력을 이긴 것’이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문명적 폭력’은 불가능한 명제

전쟁이나 폭력을 ‘문명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경의 강간은 본질적으로 ‘비문명적인’ 일본인의 전쟁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부분이다. 폭력이 ‘가능성의 기술’로서 정치에서 불가피하다는 개념(이는 마키아벨리에서 기원하는 것이다)은 반드시 논쟁 대상이 되어야 하며 격렬하게 반박되어야만 한다. 이 시점에서 체코의 하벨 대통령이 정치란 ‘불가능성의 기술’이며, 권력 유지에 이용되는 음모와 폭력은 부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폭력은 타자에게 피해를 주고 심지어는 죽음까지 가하려는 의도로 사용된다. 긍극적으로 폭력은 지구의 표면(surface)에서 타자를 말소(effacement)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대화에서 (타자의) 다른 점이나 동의하지 않는 부분을 근절하기 위해 치르는 대가이다.

사육제(carnivalesque)와 살육(carnage)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사육제란 전복과 위반의 장(場)이 될 뿐만 아니라, ‘상호 존재’로 이루어지는 거미줄 같은 이 세계를 아끼고 보존한다. 사육제는 가능성의 기술로서 정치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성의 기술로서 정치에서 결코 배제될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 몸의 정치의 미래는 바로 사육제에 달려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