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고려 시대 중국어 회화 책<老乞大>발굴
  • 蘇成玟 기자 ()
  • 승인 1999.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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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집필된 중국어 회화 책… 국어·한자 발전사 연구에 큰 도움
실재했는지 여부조차 불투명했던 책이 발굴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조선 시대 사역원에서 사용된 40쪽짜리 중국어 회화 교재인 〈노걸대(老乞大)〉 원본이 발견된 것이다. 이 책은 14세기 후반 고려의 충숙왕 또는 공민왕 때에 원대(元代) 한어(漢語)로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문서이다.

원본 〈노걸대〉가 발견된 것은 지난해 4월. 남권희 교수(경북대·문헌정보학과)가 대구시의 한 개인 장서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남교수는 이 책을 서지학적으로 고찰한 뒤 9월에 정 광 교수(고려대·국문과)와 양오진 교수(덕성여대·중문과)에게 제시했다. 세 교수는 연구를 공동 진행해 1차 결과를 지난해 12월17∼19일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제25회 국어학회 공동 연구회에서 정식 발표했다.

〈노걸대〉는 〈박통사(朴通事)〉와 더불어 6백여 년간 중국어 회화 교과서로 활용되어 왔다. 원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노걸대〉의 최고본(最古本)은 조선 중종 시대에 최세진이 집필한 〈번역 노걸대〉였다.
고려 상인의 중국 생활, 대화 형식으로 꾸며

〈노걸대〉에서 ‘노’는 진(眞)을, ‘걸대’는 중국을 뜻한다는 학설이 일반적이다. 걸대는 거란(契丹)을 음역한 말인데, 거란을 세운 몽고족이 훗날 원나라를 건국하자 중국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쓰였다는 해석이다. 〈노걸대〉는 고려 상인 일행이 말·베·인삼을 팔러 원나라의 수도 베이징으로 떠나다가, 랴오둥(遼東) 지방에서 중국 상인 일행을 만나 동행하면서 겪은 일들을 대화 형식으로 묶은 회화 교재이다.

원본 〈노걸대〉는 최세진이 쓴 〈번역 노걸대〉에서 ‘구본’이라는 몇 차례 지적이 등장해 그 존재가 추정되었을 뿐, 실재 여부조차 분명하지 않았던 책이다. 이번에 발견된 책은 최세진이 지적한 원본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학계가 원본 〈노걸대〉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책이 원대의 한어가, 그것도 생생한 구어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어(漢語)는 원나라가 중원을 장악해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기존 중국어에 몽고어가 뒤섞이면서 생겨난 ‘짬뽕 언어’이다. 원에 이어 명·청으로 지배자가 바뀌자 〈노걸대〉도 명대 한어, 청대 한어로 고쳐진 수정본이 계속 나왔다. 따라서 원본 〈노걸대〉는 중국어 변천사를 밝혀 주는 결정적인 자료이다.

〈노걸대〉는 국어의 발전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없어서는 안될 자료이다. 이를테면 원본 〈노걸대〉 11쪽에는 ‘첩락(帖落)’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국어의 ‘두레’가 몽고어에서 유래했음을 입증한다. 첩락은 ‘바가지’를 뜻하는 몽고어 ‘토로(torho)’의 한자 표음이다. ‘토로’가 음운 변화하여 두레가 되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최세진의 〈번역 노걸대〉에는 중국의 지배 주체가 바뀜에 따라 몽고어인 첩락 대신 명대 한어인 ‘주자(酒子)’로 바뀌어 기록되어 있다.

만주 하얼빈 태생인 조선족 양오진 교수는 “원본 〈노걸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심장마비에 걸리는 줄 알았다”라고 당시의 감동을 말했다. 그는 94년 중국 베이징 대학 동방어문학과 교수 직을 휴직하고 한국에 와 지난해 8월 고려대 대학원에서 논문 〈노걸대 박통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지난해 같은 이름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태학사 펴냄).

지금까지는 원본 〈노걸대〉가 명대 초기에 집필되었다는 주장이 유력하게 제기될 정도로 원본의 편찬 연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양오진 교수는 그의 〈노걸대 박통사 연구〉에서 두 책의 원본이 원대 말기의 한어로 쓰였다는 사실을 ‘한어문에 보이는 어휘와 문법의 특징’을 분석해 입증했다. 그런데 발표한 논문의 잉크가 마르기 무섭게 그의 주장을 사실로 밝혀 주는 원간본이 발견된 것이다. 양오진 교수는 현재 이 사실을 중국 학계에 보고하려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고려 사회 풍속 생생… 중인 연구에 좋은 자료

83년 국립 타이완 사범대학에서 논문 〈조선역학고〉로 박사 학위를 받은 임동석 교수(건국대·중문과)는 원본 〈노걸대〉의 가치를 ‘국보급’이라고 평가했다. 중국에서도 80년대 말부터 〈노걸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한·중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노걸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자 중국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이 뒤늦게 커지고 있다.

임교수에 따르면 80년대 초반만 해도 〈노걸대〉나 〈박통사〉가 중국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중국 학자들이 한국의 유학생들에게 ‘너희 나라에 그런 보물이 있지 않느냐’며 연구를 권장할 정도로 중시하고 있다.

원본 〈노걸대〉는 어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고려·중국의 사회 풍속 및 문물 교류를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여기에는 두 나라의 사회상과 시대상이 대화를 통해 다양하고 생생하게 드러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고려인은 마른 음식을 즐겨 먹었으며, 중국인과 달리 고기를 볶아 먹을 줄 몰랐고 탕과 면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려인은 중국의 사치품보다 생필품을 좋아했다 △고려 남성은 중국 남성과 달리 여성 대신 우물에 물을 길러 다니지 않았다 등이다.

중국 상인이 민가에 하룻밤 잠자리를 부탁하는 원본 〈노걸대〉의 한 대목은 이 책이 원대에 편찬되었음을 입증한다. 민가의 주인이 중국 상인을 ‘달달인(達達人:몽고인)의 집에서 도망쳐 나온 한인(漢人) 노예’로 오인해 숙박을 거절하는 장면이다.

최세진의 〈번역 노걸대〉에서는 민가 주인이 중국 상인을 ‘달달인’으로 오인해 그의 요청을 거부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최세진이 원본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달달인 뒤에 이어지는 ‘구구(軀口:한인 노예)’라는 어휘를 삭제한 결과였음이 밝혀졌다. 한족이 다시 중원을 장악한 명대에 그들의 비참한 과거사를 계속 교재에 수록할 수 없었던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어학 분야를 제외하면 이같은 역사적 보고(寶庫)에 대한 관련 학계의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이는 〈노걸대〉가 중인 신분인 역관들이 쓰던 회화 교재였다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동안 중인 및 그 이하 계층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서 소외되어 왔다.

일반 백성과 가까운 위치에서 그들을 실질적으로 다스렸던 계층은 중인이었다. 중인들은 잡과를 통해 형조(율과)·호조(산과)·사역원(역과)·제중원(의과)·장악원(악과)·관상감(풍수지리과) 등에 진출했다. 지방에서는 중인 계급인 ‘아전’이 관아에서 실질적 권력을 행사했다.
역관들은 신분상으로는 중인이었지만 외교관의 특권을 누리며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실력자들이었다. 〈훈몽자회(訓蒙字會)〉를 지어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한 최세진도,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 변부자로 등장하는 실존 인물 변승업도 역관이었다.

중인 이하 계층에 대한 연구가 부진한 이유는 그들과 관련한 문헌이나 기록물이 거의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인재 등용 수단이었던 과거 제도에 관한 기록물만 해도, 문무 양과를 제외한 잡과의 것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양오진 교수는 6백여 년간 7∼8 차례 이상 수정되며 전해져 온 〈노걸대〉와 〈박통사〉만 갖고도 ‘노박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설정할 수 있을 만큼 두 책의 내용이 풍부하고 방대하다고 평가한다.

그렇더라도 역사 자료 발굴과 보존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노력은 시급하다. 6백여 년 만에 〈노걸대〉가 발굴되었듯이, 지금도 어느 다락방에 역사적 보물이 묻혀 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절도범의 횡포 때문에 이것들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원본 〈노걸대〉의 개인 소장자가 신분을 숨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원본 〈노걸대〉를 발견한 남권희 교수의 제안은 귀기울일 만하다. 우선 지방마다 ‘문헌관’을 설치해 문중이나 개인이 소장한 문화재를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해 주고, 또 이를 목록으로 정리한 다음 필요한 자료는 복사해 학교나 연구 기관에 제공하자는 것이다. 남교수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제기하는 문제도 선생님은 왜 사대부나 ‘가진 자’들의 문헌만 연구하느냐는 것이다. 나도 학생들과 같은 생각이지만 역사에는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계층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조선 시대부터는 찾기만 한다면 그렇지 않은 문서들도 많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6백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원본 〈노걸대〉는 대대 손손 침침한 촛불 아래서 그 책을 짓고 고치고 읽었을 이름 없는 역관들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시부(詩賦)나 육경고문(六經古文)이 아니면 문장 취급을 못 받던 시대가 지난 지 오래이지만, 실생활의 지혜를 담은 선인들의 기록은 여전히 그늘 아래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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