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문화]넥타이 시대는 가라!
  • 성우제 기자(wootje@e-sisa.co.kr) ()
  • 승인 2000.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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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등 대기업 잇달아 ‘복장 자율화’…창의성 높이기 일환
‘넥타이 부대’가 있었다. 사회 변혁에 적극 참여한 직장인을 일컫는 말이다. 넥타이는 직장인을 상징하는 가장 유력하고 명쾌한 도구인데, 그 상징 효과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나타난 대기업 ‘복장 자율화’가 올해 들어 유행처럼 번지면서 샐러리맨들이 넥타이를 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제일제당을 시작으로 LG전자·삼성SDS·한솔CSN 등이 넥타이를 풀었으며, 얼마 전에는 SK와 굿모닝증권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기업 문화가 가장 보수적이라는 금융기관까지 참여했으니, 넥타이 풀기 유행이 큰 위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짙은 색 양복에 깔끔한 와이셔츠, 넥타이와 구두로 이루어진 직장인의 정장이 티셔츠·남방·면바지, 심지어 청바지·운동화로까지 바뀐 데는 벤처 기업의 열풍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아이디어·창의력·도전 정신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벤처 기업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대기업이 그 문화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코오롱은 6월1일부터 넥타이를 풀고 출근하는 매주 수요일을 아예 ‘챌린지데이’로 부른다. 코오롱 홍보실의 한 관계자는 “벤처 기업의 도전 정신을 닮자는 뜻으로 이 제도를 도입했다”라고 말했다.

대기업들이 복장 자율화를 결정하게 된 동기는 ‘변해야 산다’는 절박함에서 말미암았다. 지난해 9월 대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자율복을 입기 시작한 제일제당은, 기업 문화 바꾸기의 한 방편으로 넥타이를 풀었다. 보수적인 기존 문화로는 새로운 환경에서 경쟁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몇년 전만 해도 제일제당 사원들은 인사팀의 ‘감시’를 받으며 출근했고, 조회 시간에는 모두 ‘기립’해 ‘부동 자세’로 사가(社歌)를 ‘경청’해야 했다. 상사와 부하 직원 간의 관계도 상명하복이라는 수직적 명령 체계가 근간을 이루었으며, ‘획일주의’ ‘관행 존중’ ‘보수주의’ 따위 가치관이 회사 문화를 지배했다. “그것을 어떻게 하면 창의적이고 도전적이고 발랄한 문화로 바꿀지 4~5년간 고민했다. 고민 끝에 나온 것이 복장 자율화와 단일 호칭, 출퇴근 자율화이다”라고 제일제당 조직문화파트 김태호 과장은 말했다.
“오후 5시면 사다리를 탄다”

제일제당은 올 1월부터 회장에서부터 갓 입사한 신입 사원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님’이라고 부른다. 상사가 부하 직원을 존중하다 보니 “어이, 김과장 이리 와봐! 당신 매출 이게 뭐야?”라는 말투가 “김태호님, 매출이 어떻게 되었어요?”라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대기업의 복장 자율화가 노리는 효과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역시 창의성과 효율성이다. 10대를 비롯한 젊은 대중은 소비 시장의 주체이다. 예전 방식대로 젊은 직원을 억누르고 눈치나 보게 해서는, 소비 주체의 욕구에 맞는 상품을 개발하기가 불가능하다. 젊은 직원들의 사고 방식을 가능한 한 유연하고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젊은 소비자의 기호를 읽고 상품을 개발하게 하는 경영 전략을 채택한 셈이다. 1953년에 설립된 제일제당은 이같은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음료와 다이어트 식품 시장에서 큰 성과를 올렸고 젊은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대외에 과시할 수 있었다고 제일제당측은 밝혔다.

제일제당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신입 사원을 모집할 때도 ‘정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제일제당 그룹홍보실 문형진 팀장은, 자율 복장제와 호칭 변경의 구체적인 효과를 계량화한 수치로 밝히기는 불가능하다면서도 사내의 달라진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몇년 전만 해도 사내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요즘은 오후 5시에 먹거리를 사기 위해 사다리 타기를 많이 한다. 가장 큰 성과를 꼽는다면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저항감을 없앴다는 것이다.”

지난 7월1일부터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영업직 이외에는 넥타이를 모두 풀게 한 SK도 복장 자율화 제도를 도입하게 된 가장 큰 이유를 ‘경직되고 일률적인 사고로는 새로운 환경에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을 꼽았다. “개인의 유연한 사고가 커뮤니케이션 활성화로 이어지고, 그것은 조직의 힘으로 나타난다. 복장 자율화는 직원들끼리 격의 없이 터놓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라고 SK텔레콤 김동원 경영지원팀장은 말했다.

벤처 열풍과 더불어 넥타이를 푸는 대기업이 잇따르자 남성복 시장도 크게 변하고 있다. 남성 캐주얼 브랜드 ‘신원 지이크’ 구희경 디자인실장에 따르면, 캐주얼 시장은 지난해에 비해 40% 급성장했다. 캐주얼은 이제 남성복 시장의 노른자위이다. 구실장은 “개성을 드러내기 힘든 딱딱한 정장이 그만큼 줄어들었다고 보면 된다”라며, 옷에 대한 젊은 소비자층의 마인드 변화로 인해 기업들의 자율복 추세가 빠르게 확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복장 자율화는 1990년대 초 미국 기업, 1990년대 말에는 일본 기업이 도입한 제도이다. 1998년에는 최소한 하루 이상 자율 복장으로 출근하는 미국 기업이 97%에 이르렀으나, 미국은 최근 정장으로 돌아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복장 자율화마저도 경직되고 획일적인 문화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한국 대기업의 넥타이 풀기는 단순한 옷차림 문제가 아니라, 기존 관행과 형식으로는 사회 변화를 따라잡기 불가능하다는 데서 나온 기업 문화 바꾸기의 전형적인 사례로 보인다. SK텔레콤 이항수 홍보실 차장은 “멀쩡한 사람도 개구리복(예비군복)을 입으면 달라지듯이, 자율 복장이 사고 방식을 바꾸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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