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도서관에 기적은 없는가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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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운영되는 곳은 순천·제천·진해 세 군데 대부분 지자체 이해 부족으로 ‘마찰’ 일어나
오전에 비교적 한산하던 도서관은 초등학교가 파하는 오후가 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도착한 아이들은 키 높이로 맞춘 서가에서 책을 뽑아든 뒤 주변 바닥에 아무렇게나 둘러앉아 책을 읽었다. ‘이야기방’ ‘아가방’ ‘다매체실’ ‘수면실’ 같은 명패를 단 작은 공간에는 구연동화를 듣는 아이들과,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보는 엄마들로 가득했다.

전남 순천시 해룡면 상삼리 주택가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순천 기적의도서관’의 평일 모습이다. “이곳은, 도서관은 정숙하게 공부하는 곳이라는 기존 관념을 깨고 있다. 아이들이 책과 쉽게 친해지도록 한 이 공간이 너무 좋다.” 개관 때부터 다섯 살 난 딸과 함께 매일 들른다는 자원봉사자 이수련씨(38)가 말했다.

 
순천 기적의도서관은 지난해 2월 대구·충남 금산과 함께 1차 대상지로 선정된 뒤 11월10일 전국 최초로 개관한, 기적의도서관 1호관이다. 3백95평짜리 2층 철골조 건물 외벽을 나무로 씌워 아담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지금까지 하루 평균 8백여 명씩 연인원 16만 명이 이용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기적의도서관은 독서운동 시민단체인 ‘책 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책읽는사회·대표 도정일)이 주관하는 어린이 도서관 짓기 프로젝트의 명칭이다. 흔히 방송사가 기획한 이벤트 행사로 아는 이가 많은데 잘못 알려진 것이다. 책읽는사회는 지난 한 해 동안 MBC <느낌표> 프로그램과 손잡고 전국 열두 곳에 기적의도서관 후보지를 선정했고,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도서관을 짓고 있다. 지금까지 기적의도서관은 충북 제천과 경남 진해(지난해 12월), 제주와 서귀포(지난 5월) 등 모두 다섯 곳에서 개관했다. 이밖에 충북 청주와 울산이 7월 개관을 준비 중이다. 충남 금산에서는 곧 착공될 예정이다.

그런데 최근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짓기로 한 기적의도서관이 무산되면서 프로젝트 자체에 이상이 생긴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고양시는 지난 6월22일, 일산구 주엽동에 짓기로 한 기적의도서관 계획을 백지화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시가 부지와 건축비를 모두 부담하고 있는데 책읽는사회가 무리하게 운영에 간섭하고 있다’는 것이 고양시가 밝힌 백지화 사유다. 이에 대해 책읽는사회는 ‘시가 민간 참여라는 합의 정신을 어겼다’고 비판했다(도정일 교수 인터뷰 기사 참조). 고양시는 대신 자체적으로 어린이 도서관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시사저널>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의 중간 상황을 취재했다. 그 결과 곳곳에서 ‘누수 현상’이 드러났다. 현재까지 제주·서귀포·청주 등 최소한 세 곳에서 운영 방식을 놓고 책읽는사회와 해당 지자체가 다투는 중이다. 도서관 예산이나 규모 때문에 갈등을 겪는 곳도 있다. 갈등을 겪다가 설립 계획 자체가 사실상 무산된 곳은 고양시 외에 두 군데가 더 있다. 대체적으로 민간 참여에 대한 지자체의 이해 부족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 방송 후유증과 책읽는사회의 의욕 과잉이 겹쳐 마찰을 키웠다는 지적이 있다.
제주도에는 제주시와 서귀포시 두 군데에 기적의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두 곳 모두 지난 5월5일 개관했다. 하지만 두 곳 모두 현재까지 운영위원회조차 구성하지 못한 상태다. 지자체에서 민간인들로 운영위원회를 꾸리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청주 기적의도서관도 완공된 지 두 달이 지난 최근까지 운영권 갈등을 겪었다. 청주시가 일방적으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한 뒤 수탁 기관을 정해버렸기 때문이다.

인천시 부평구 부개동에 짓기로 한 기적의도서관은 규모와 예산을 둘러싼 의견 차이 때문에 10개월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두 기관은 지난 6월16일, 건축은 부평구가 전적으로 책임지며, 책읽는사회는 설계 비용과 콘텐츠만 제공한다는 것에 구두로 합의했지만, 아직 설계조차 확정하지 못한 상태여서 언제 착공할 수 있을지 미정이다.

마찰을 겪다가 계획 자체가 백지화한 곳은 고양시말고도 대구 달서구와 강원도 태백시이다. 대구 달서구에 짓기로 한 기적의도서관은 달서구가 건축비를 한푼도 낼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사실상 무산되었다. 지역 주민들이 유치 신청을 해 추진되던 강원도 태백시 기적의도서관은 지자체에서 운영할 돈이 없으니 차라리 안 지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혀와 계획 추진이 중단되었다.

현재 정상 운영되고 있는 곳은 전남 순천·충북 제천·경남 진해 세 곳뿐이다. 이들 세 곳은 모두 MBC <느낌표> 프로그램의 ‘책책책을 읽읍시다’ 코너가 방송 중일 때 문을 연 곳들이다. 반면 나머지 지역에서는 방송이 끝난 올해 초부터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MBC는 담당 PD를 교체하면서 ‘책책책을 읽읍시다’ 코너 또한 폐지했는데, 이후 우려했던 방송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책읽는사회 관계자는 “방송 중일 때는 유치 경쟁을 벌이더니 방송이 끝나자 민간과 함께 하는 일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단체장이 많다”라고 말했다.

현재 <느낌표> 선정 도서의 수익금 52억원은 여섯 곳(제주는 독지가의 기부채납 형식으로 지어졌다)의 도서관을 짓느라 거의 바닥 난 상태. 현재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기금 조성에 나서고 있으나 지지부진한 형편이다. 방송 중일 때는 책이나 비품 상당수가 협찬에 의해 채워졌지만, 홍보 효과가 없어진 지금은 그마저 여의치 않다.

지자체의 가벼운 처신 못지 않게 이벤트성 기획으로만 일관한 방송사와, 이에 편승해 과잉 의욕을 부린 책읽는사회도 문제를 키웠다는 지적이 있다.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에 처음부터 깊이 관여했던 허순영 순천 기적의도서관 관장은 “처음에는 <느낌표> 선정 도서의 수익금이 80억원쯤 되고, 10여 개 정도는 전액 지원해서 지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막상 수익금은 52억원밖에 되지 않아, 결국 지자체와 절반씩 부담하는 걸로 계획을 수정했다. 이 사실이 제때 알려지지 않아 일부 지자체의 반발이 컸다”라고 말했다.

기적의도서관은 그동안 건축 형태나 운영 프로그램에서 새로운 도서관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을 들었다. 이미 순천시는 지자체 차원에서 작은 도서관 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경기도는 도서관 100곳을 짓겠다고 공약하는 등 파급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채 절반도 완성되지 않은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가 위기를 맞은 셈이다.

도정일 교수는 “기적의도서관은 우리의 미래에 투자하는 사업인 만큼 꼭 성공할 수 있도록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국민들의 지속적인 성원을 부탁한다”라고 말했다. 민·관 합작 모델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는 평을 듣는 조충훈 순천시장은 “기적의도서관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화 공간이다. 지자체가 예산을 투자했지만 철저하게 민간에 돌려준다는 생각으로 지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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