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가 강타한 ‘에코의 후예’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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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 코드> <단테클럽> 국내에서도 인기몰이
셜록 홈즈·오귀스트 뒤팽·아르센 루팽·엘러리 퀸·에르큐르 포와로…. 한 시절 독자를 들뜨게 했던 명탐정들이다. 어떤 음모와 죽음의 비밀도 이들 손에만 걸리면 단순하고 투명하게 까밝혀진다.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인기를 좌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탐정의 ‘개인기’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다빈치 코드>(전 2권, 댄 브라운 지음, 베텔스만 펴냄)와 <단테 클럽>(전 2권, 매튜 펄 지음, 황금가지 펴냄)은 지금까지의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음모와 미스터리, 연쇄 살인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수수께끼 풀이형의 고전적인 추리소설이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과는 계보에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 역사 소설 형태를 띤 지적 스릴러쯤이라고 할까.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되어 화제를 일으켰던 두 작품이 올 여름에는 불황에 허덕이는 국내 출판계를 강타하고 있다. 6월 말에 선보인 <다빈치 코드>는 사전 예약까지 받는 인기몰이를 하며 한 달 만에 12만부가 팔렸다. <단테클럽>도 시내 주요 서점의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랐다.

<다빈치 코드>는 소니에르 루브르 박물관장을 비롯한 파리의 명사 4명이 하룻밤 사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벌어지는 범인 찾기와, 예수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해 후손을 두었고 교회는 그것을 2000년이나 숨겨왔다는 ‘그림자 역사’를 교직시키며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를 선보인다. 19세기 후반 미국 보스턴의 문인 사회를 배경으로 한 <단테 클럽>은 판사·성직자·사업가 등의 연쇄 살인을 기둥 줄거리로 하면서 단테의 <신곡> 번역을 둘러싼 문학인들과 보수학계·기독교계의 갈등을 소설 전편에 촘촘히 박아 넣었다. 물론 <다빈치 코드>에서 살인 사건 해결이 단지 이야기를 풀어내는 실마리일 뿐 목적이 아니듯 <단테 클럽>에서도 연쇄 살인의 범인을 찾아가는 것이 소설 읽기의 진미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두 작품의 계보학적 ‘스승’은 아마도 움베르토 에코, 특히 <장미의 이름>에 닿아 있다.

14세기 초반 이탈리아 북부의 수도원에서 일어난 수도사들의 의문사를 소재로 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1980년에 발표된 이래 역사추리소설의 전범으로 옹립되면서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소설 기법이 차용되었다. 국내에서도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나 구효서의 <비밀의 문> 등에서 에코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에코는 인문학적·역사적 지식과 ‘팩트’(사실)를 ‘픽션’(소설) 속에 녹여놓음으로써 소설과 역사의 경계를 해체했다. <다빈치 코드>의 작가 브라운 역시 소설 속에 ‘시온 수도회’나 ‘오프스 데이’ 등 실재했던 비밀 기독교 단체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버무려놓음으로써 기독교사의 이설을 ‘역사적 진실’로 포장해놓았다. <단테 클럽>에서는 헨리 워즈워스·롱펠로나 제임스 러셀 로웰·올리버 웬들 홈스 등 실존했던 시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허구와 현실 역사의 경계를 잇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뿐만 아니다. <다빈치 코드>의 ‘예수의 부인과 후손을 다룬 기독교 경전이 숨겨져 있다’는 설정은 <장미의 이름>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이 실은 희극을 다룬 2편까지 존재했다는 설정과 닮았다. 철자를 뒤섞어가며 새로운 낱말을 맞추는 아나그램(Anagram)을 통해 비밀의 키를 찾아가는 추리 ‘유희’ 과정은 에코식 현학 취미를 보는 듯하다. 예를 들어 소니에르가 죽어가면서 남긴 ‘오, 불구의 성인이여!(Oh, lame saint!)’라는 알파벳 열한 글자는 ‘모나리자(The Mona Lisa)’로 재조합되며, 이는 살인 사건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는 식이다.

<단테 클럽>도 <장미의 이름>과 닮기는 마찬가지. 첫 희생자인 판사는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구더기가 온몸을 파먹는 고통을 겪으며 죽는다. 시체가 즐비한 납골당 바닥에 거꾸로 묻힌 채 불에 타죽는 목사나 온몸이 갈가리 찢긴 채 갈고리에 매달려 신음하는 사업가의 모습 또한 <신곡>에 묘사된 대로다.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사들은 <요한 계시록>의 내용에 따라 죽어갔다. <단테 클럽>에서 <신곡> 번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문학과 언어에 대한 논쟁은 <장미의 이름>에서 문학과 종교를 놓고 벌이던 윌리엄과 호르헤의 논쟁을 연상시킨다.
세 소설의 작가가 공히 주목하는 것은 중세와 기독교다. <장미의 이름>의 무대는 서기 1327년 11월 말의 수도원이며, <다빈치 코드>에는 1188년부터 시작된 시온 수도회의 역사가 전편에 걸쳐 나열된다. 단테가 <신곡>을 쓴 때도 14세기 초다.

이 작가들만이 아니다. 20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학계·문화계에서는 중세를 다시 보자는 움직임이 각광받고 있다(<시사저널> 제746호 참조). 기독교 문명이 온갖 광신과 이념으로 오염된 현재에 중세가 새로운 ‘원시반본’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문학 평론가 서영채에 따르면, <장미의 이름>이 탐색한 대상은 금단의 지식, 즉 진리다. 진리를 가운데 놓고 윌리엄의 이성주의와 헤르헤의 신앙주의가 대립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에코는 근대성의 핵심인 주체 중심적 이성을 비판하는 반성적 담론을 펼쳐 보인다.

이처럼 정치한 인문학적 문제 설정은 ‘제자’들의 소설에서도 언뜻 엿보인다. 댄 브라운은 이본 성서의 진실을 둘러싼 종교 권력 문제를 다루며, 매튜 펄은 진리를 담은 언어 문제를 건드린다(<단테 클럽>에서 보수 학계와 교단 인사들은 라틴어가 아닌 속류 ‘이탈리아어’로 씌어진 외국의 독이 문학으로 변장해 퍼진다는 점에 결정적으로 분노한다).

그런데 에코와 ‘제자’들의 공통점은 여기까지뿐이다. 에코가 진리의 문제에 끝까지 천착한 반면, 브라운과 펄은 이를 지적인 퍼즐 맞추기 ‘게임’으로 바꾸어냈다. <다빈치 코드>에는 나아가 ‘원 소스 멀티 유즈’를 염두에 둔 할리우드식 기획력까지 엿보인다. 가령 주인공 로버트 랭던은 하버드 대학 종교기호학 교수로 그려지는데, 실명까지 곁들여서 배우 해리슨 포드와 비슷한 외모로 설명된다. 랭던이 미모의 암호 해독가 소피 느뵈와 키스하며 밤하늘을 쳐다보는 마지막 장면은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해피엔딩을 상징하는 메타포다.

하지만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제자’들의 미덕이 돋보인다. 한때 <장미의 이름>은 ‘처음 100페이지만 넘기면 재미있다’는 말이 돌 정도로 난해해 독자들의 ‘공부 콤플렉스’를 건드렸지만, <다빈치 코드>는 단숨에 읽어버리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스승과 제자’의 승부는 그런 면에서 무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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