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기초 학문 황무지에 세운 '금자탑'
  • 박성준 기자 (snype00@e-sisa.co.kr)
  • 승인 2001.01.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우학술총서, 18년 만에 500권 돌파…고전총서·석학강좌로 새로운 도약 준비

사진설명 3자 연합 : 대학학술총서는 재정은 재단, 진행은 한국학술협회, 출판은 아카넷(사장 김정호·오른쪽 두번째)이 맡는다.

대우학술총서가 출판 18년만에5백 권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민음사·아르케에 이어 총서 출판 사업을 맡아온 아카넷(대표 김정호)은 최근 폴 리쾨르의 명저 〈해석의 갈등〉 번역판을 냄으로써 총서 출판 대장정에한 획을 그었다.


자연과학에 치중…굵직굵직한 저술상 받아

대우학술총서는 알려진 대로 대우그룹김우중 전 회장이 국내기초 학문 분야연구자에 대한 지원과, 기초 학문 육성을 위해 사재 2백억 원대를 재단에 쾌척함으로써 간행되기 시작했다. 2년여준비한 끝에 처음 내놓은 책은 1983년 8월에 펴낸 〈한국어의 계통〉(김방한).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순항하던 총서간행 사업은, 1997년 말몰아닥친 IMF사태 이후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김우중씨가 해외로도피하면서 중단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사업 주체인 재단이 흔들리는 동안총서 간행을 책임진 출판 영역에도 적지않은 변화가 있었다. 총서를 간행해 온 민음사가 1999년 손을 뗀 것이다. 이후 총서 간행 책임은 잠시 아르케의 수중에 있다가 지금은 아카넷으로 넘어갔다. 1999년 말 총서간행 대임을 맡은 아카넷은 〈18세기 프랑스 정치 사상〉(앙리 세)을 시작으로 2001년 1월 현재 역·저서 30여 권을 발간했다.

지난 18년 동안대우학술총서가 국내 학계, 특히 기초 학문 분야에 이바지한공로는 만만치 않다. 총서라는이름을 달고나온 책들은 각종 저술상을 받았다. 1986년 〈한국지질론〉(장기홍·당시 경북대 지질학과교수)이 한국과학기술도서상 저술상을 받은 것을비롯해 〈소립자와 게이지 상호 작용〉(1987년 한국과학상 대상) 〈홍대용평전〉(1987년 한국출판문화상) 〈한국농학사〉(1989년월봉학술상) 〈자유주의 원리와역사〉(1992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 〈마키아벨리평전〉(2000년 가담학술상 번역상)이 굵직굵직한 저술관련 상을 수상했다.

대우학술총서는 크게 논저·공동 연구·번역 분야 성과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인문·사회 과학 분야가 1백24권,자연 과학 분야 1백53권, 번역 분야1백53권, 공동 연구분야 64권, 자료집 6권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지금까지 나온 책들의 주제가 분야를막론하고 기초 학문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화학·수학·물리학·생물학 등 일반 출판계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를면치 못해온 책들을 다량 출판한 것은 대우학술총서의 가장 큰 공적으로 꼽힌다. "번역분야로 분류된 책을 합치면 자연 과학 분야가 전체 총서의 절반을 훨씬 넘어설 것이다"라고 아카넷 정연재 출판팀장은 말한다. 그만큼 대우학술총서는 자연 과학 분야에서 기초를 다지기 위해총력을 기울였다. 물론 이같은 사정은 다른 분야도 예외가아니어서, 대우학술총서는 언어학·지리학·고고학·서지학 등 사회 일반의관심과는 거리가 멀지만 학문의균형 발전을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인문·사회 과학 분야 서적들을 다수 아우르고 있다.

이같은 결과는 대우재단이 학술 지원 사업을 벌이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껏 고수해온 출판 이념과도 무관치 않다. IMF 사태 이후 거듭된 실패로 의미가 퇴색하기는 했지만, 김우중씨는 사재를 출연하면서 '이 돈을 우리 학계에서 불우·부진한 분야에 써달라'고 부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조성된 돈은 원래의 용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투입되었다.

수많은 신진·소장 학자가 대우재단 또는 학술 지원 및 출판 사업을 실질적으로 관장한 한국학술협의회의 적극적인 발굴 노력에힘입어 각자 전공 분야의 간판 또는중진으로 성장했다.〈한국의 풍수사상〉(최창조·지리학) 〈양자광학〉(이상수·물리학) 〈라이군의 표현론〉(양재현·수학) 〈과정과 실재〉(화이트해드·철학) 등 한국적 학문풍토에서는 감히 나오기 힘든 책들이 이렇게 해서 묶였다.


저자 수소문해 연구과제 맡겨

대우학술총서는 그동안 '대상 연구자(연구 분야) 공모-심사-선정-연구비 및 출판 지원'이라는 얼개로 간행되어 왔다. 여기서 특히 중요하게 기능한 기구가바로 한국학술협의회다. 현재까지 4대째 대물림되어 온 이 기구는, 현 김용준 이사장(고려대 명예교수)의회고에 따르면, 연구비 지원 관행의협소한 틀을 깨기 위해 민간이 처음 시도한 획기적방식을 도입했다. 심사 대상에 학계·비학계 구분을 두지 않음으로써 제한된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구비 지원 관행을 깨뜨린 것이다.

협의회는 '문호를 개방한다'는 정신에 입각해 초창기에는 아예 지원 대상을 찾아다니는 방식으로 업무를 해결했다.예컨대 협의회가 심사를 거쳐 중요한 전공 분야라고판단한 경우에는, 당사자는 생각지도않았는데 직접 찾아가 연구 과제를 맡기기도했다는 것이다. 김용준 이사장은 "현 연세대 김병수총장도 협의회가 직접 수소문해 연구비임자를 찾아낸사례이다"라고 말했다.

재단(재정 지원)·협의회(기획및지원 심사)·출판사(연구 과제 출판) 3자 협업체제로 운영되는 대우학술총서는 올해 총서5백권 돌파를 발판으로 새로운도약을 다짐하고 있다. 기존 학술총서는 그대로 살려 가되, 올해 하반기부터 '대우고전총서'라는 이름의 새로운 총서 기획을 진행하고,지난해부터실시하고 있는 '세계 석학 강좌'를 출판사업으로 연결한다는것이다.

두 가지 신규 사업중 특히 학계의눈길을 끄는 것은 '고전총서' 사업이다. 아카넷 김정호 사장은 "지금까지 국내의 고전 번역 사업은 크게 두 가지 문제가있었다. 하나는 고전이 중요한데도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일반 출판사가 여전히 외면한다는 것이며, 그 때문에 잘못된 번역서가 시장에서 도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며 고전 번역 사업의 절실함을 강조한다. 고전은 흔히 동서양쪽으로 나뉘는데, 협의회와 출판사측은, 동양 고전의 경우 일부 학술기관에서 지속적인 번역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판단해 관심을 주로 그리스어·라틴어로 쓰여진 서양 고전에 두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돈이다. 돈이 학문 수준을 100%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만, 재정 지원이 잘 안되는 학문 연구가 높은생산력을 내리라고 기대하기는 난망하다.또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출판사로서도 수익이 담보되지 않는 양서 출판을 언제까지고 고집할수는 없는노릇이다. 바로 이점에서 대우학술총서는또 다른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철학자 박이문씨의〈더불어 사는 인간과 자연〉




일흔을 넘긴 노학자가 담담하게 써내려간 '20세기 반성문'. 포항공대 교수를 마지막으로 기나긴 학문 역정에 마침표를 찍고 지난해부터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은퇴 이후'라는 제2의 인생을 사는 철학자 박이문씨의 새 책 〈더불어 사는 인간과 자연〉(미다스북스)이다.


20세기 성찰과 21세기 전망을 '세기의 화두' 등 대주제 4개로 갈무리해 펴낸 이 책의 서두를, 그는 생애에 대한 자못 숙연한 자기 반성으로 시작했다. 그는 20세기를 험악한 산길에 비유했다. 또 그 험난했던 등정을 무사히 마치고 21세기로 '하산'한 데 대해 살아 있는 자의 기쁨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눈에 비친 20세기는, 특히 식민지 수탈과 전쟁의 아비규환, 군사 정권의 강압으로 점철된 한국 상황에서는 '바퀴벌레와도 같은 지독한 생존력'이 없이는 애초부터 살아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이같은 고난의 시기를, 그것도 70년이나 끄떡없이 살아낸 자신의 동물적 생존술에 스스로 기꺼워하면서도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목해서 읽어야 할 대목은 은퇴한 한 대학 교수의 과거 회상이 아니라,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인 21세기 인류 동포를 향해 노철학자가 던지는 진심 어린 충고이다.


지은이는 인류 문명이 직면한 상황을 거대하고 호화롭지만 곧 침몰할 운명에 처한 타이태닉호에 비유했다. 물질 만능·경쟁 우위·인간 중심의 사고가 지구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덜 경쟁적이고, 덜 투쟁적인 대신, 더 협동적이고 더 인간적인 21세기를 갈망했다.


이를 위해 지은이는 여러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그는 먼저 지난 시기 과학 기술 발전과 문명의 진보를 이끌어온 인간중심주의를 버리라고 충고했다. 그는 또 당장 쓰임새는 없어도 궁극적으로는 그 자체가 인간의 삶을 풍요하게 하는 종류의 지식, 즉 인문학에 더 관심을 기울이자고 제안했다. 아울러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 존엄성을 잃지 않는 삶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책은 치열한 지적 사유의 온축이다. 하지만 그 지적 사유의 궤적을 따라가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지나온 시절에 대한 회고와 생활 속의 단상 등 지은이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주제 의식을 노련하게 제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