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벤처 CEO 장보고' 연구, 새 돛 올리다
  • 박성준 기자 (snype00@e-sisa.co.kr)
  • 승인 2001.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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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전 '바다 개척자' 재평가 활기…
활동 범위·항로, 피살 경위 등 조명


9세기 초·중반 한·중·일 3국의 해상 무역권을 제패하며 청해진(전남 완도군)을 중심으로 거대한 '해상 왕국'을 건설했던 해상왕 장보고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 이와 더불어 장보고 연구가 갖는 현재적 의미가 새롭게 인식되면서 '역사 속의 장보고'를 '오늘의 장보고'로 탈바꿈시키려는 시도 또한 두드러지고 있다. '무역을 통해 새 시대를 열어간 천년 전의 벤처 사업가' '동아시아 3국에 문화의 가교를 놓은 메신저' 등 21세기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새로운 별명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해적 수괴' 또는 '왕권에 도전했던 반란자' 등 장보고에 대한 종래의 부정적인 평가도 상당 부분 수정되었다. 장보고 피살 사건에 대한 학계의 최근 평가 동향이 대표적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때(828년) 청해진 대사에 임명된 장보고는 문성왕 8년(846년) '왕이 자기 딸을 왕비로 맞아 들이지 않음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왕이 보낸 자객의 칼에 목이 베였다. 최근까지 역사학계는 이 기록을 사실 그대로 인정해 장보고 피살을 신라 내부의 권력 쟁탈전 결과로 해석했다. 하지만 최근 장보고 피살 사건은 신라 내부의 단순한 권력 쟁탈전의 결과가 아니라, 당시 해상 무역권을 놓고 각축하던 한·중·일 3국의 국제적 이해와 깊숙이 관련된 사건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에 덧붙여 장보고에 대한 긍정 평가 작업이 일찍이 조선 초기로까지 거슬러올라가며, 그 내용 또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임을 밝힌 논문도 나왔다. 해군사관학교 임원빈 교수(철학과)가 작성한 〈장보고 대사의 핵심 정신 연구〉가 바로 그것이다(100쪽 상자 기사 참조).


이 논문의 핵심은 조선 시대 역사가들이 역사서의 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적극적인 관점에서 '반란자' 장보고 복권을 꾀했다는 것이다. 임교수는 "조선 시대 학자들의 노력은 개국 초기부터 조선 말까지 일관되게 이어졌다. 조선 사회가 왕조 사회였음을 감안하면 반란자를 미화하는 이같은 시도는 파격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초중고 교사들, 중국 장보고 유적지 답사




일선 초·중·고교 역사·지리 교사 2백50명은 오는 5월부터 여름방학 무렵까지 중국 답사에 나선다. 중국의 산둥·저장 지역 등 곳곳에 흩어진 장보고 유적지를 돌아보며 장보고의 행적과 그의 개척 정신을 되새기는 계기를 갖기로 한 것이다. 일선 교사들이 해외의 장보고 유적지를 찾아나서기는 이번이 처음. 지난해 봄 출범한 장보고재단(회장 김재철·무역협회장)이 1년여에 걸친 사전 조사 끝에 확정한 이 답사 프로그램은 장보고 기념 사업의 핵심으로, 전남 완도군이 중심이 되어 매년 개최하는 '장보고 축제'와 함께 앞으로 장보고 제대로 알기의 '단골 루트'로 애용될 전망이다.


학계의 움직임도 부산하다. 윤명철 박사(명지대 겸임 교수) 등 고대사 연구가·역사학자 들로 이루어진 장보고연구회(회장 김문경 전 숭실대 교수)는 최근 1차 연구 사업을 완료하고, 장보고가 활동하던 시대 동아시아 해양 문화를 중심 과제로 한 2차 연구 사업에 들어간다. 지난 5∼6년 동안 지속되어온 1차 연구는, 장보고의 생애, 장보고 선단의 규모, 교역 품목, 장보고 사적(史蹟)의 위치 확인 및 발굴 등 기초 조사와 자료 수집이 중심 내용이었다. 올해부터 시작된 2차 연구는 이를 바탕으로, 장보고의 활동을 가능케 했던 '고대 해양 문화'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장보고 연구는 문헌적 측면에서 〈삼국사기〉의 기록(본기·열전) 외에 국내에 이렇다 할 1차 자료가 적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진을 면치 못해 왔다. 역사상 바다를 무대로 활동한 인물 가운데 이순신 장군 다음으로 잘 알려진 인물인데도 연구 성과가 빈약했던 데에는, 해양보다는 육지를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에 집중했던 학계의 연구 풍토도 한몫 했다. 그나마 학계에서 이루어진 연구도 피상적이어서 장보고의 모습은 주로 〈삼국사기〉, 특히 '본기'에 그려진 대로 '왕권에 대해 모반을 시도하다 죽은 실패한 반란자'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실패한 반란자' 이미지, 1990년대 중반에 벗어




부진했던 장보고 연구는 1990년대 중반 '장보고 연구회'가 발족하면서 전기를 맞았다. 이전까지 단편적·개별적으로 진행되던 장보고 연구가 이 단체의 출범으로 조직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임에는 고대사·고고학 분야의 원로 손보기 박사(전 단국대 교수)·전 농림수산부장관 김성훈 교수(중앙대) 그리고 학계에서 가장 먼저 장보고 연구에 뛰어든 김문경 박사, 1996년 장보고의 무역 항로를 실증하기 위해 뗏목을 타고 직접 동중국해 탐험에 나섰던 윤명철 박사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모임 최대의 성과는 문헌상의 '사실(史實)'로만 존재하던 장보고를,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복원했다는 데 있다.


연구자들은 우선 9세기 당시 '동아시아 최대'였던 장보고 선단의 활동 범위, 구체적인 규모, 교역 항로 등을 확인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그 결과 장보고는 이전까지 추측되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을 세력권에 놓고 활동했음이 밝혀졌다. 김문경 교수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해외 유적지 발굴 작업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김교수는 2년 전 중국 저장성 황암 지역에서 장보고 해상 무역의 해외 거점인 신라방 유적을 발견한 바 있다. 이는 장보고의 세력권이 종래 추정되어왔던 것(산둥 반도 중심)보다 훨씬 더 넓었음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가 되었다.


무역에 이용했던 선박 등 선단의 실체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르면 장보고가 해상 무역에 이용했던 선박은 길이 20여m에, 너비 7m 안팎으로 한 척당 100∼1백50명이 승선할 수 있는 크기. 장보고는 성능 좋은 대선 수십 척으로 선단을 이루어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중개 무역을 벌이거나, 직접 물건을 생산해 교역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장보고가 취급한 교역품으로는, 당나라 도자기·페르시아산 담요·자단(자바 등지의 향목)·향료 등이 꼽힌다.


장보고 무역 선단이 이용했던 항로·항해술도 몇몇 연구자들의 생명을 건 탐험 조사 끝에 구체화했다. 윤명철 박사는 1996∼1997년 두 차례에 걸친 뗏목 탐험 끝에 해류·조류·풍향·풍속을 고려한 한·중·일 3국 간의 옛 항해도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장보고가 활동했던 9세기 무렵의 3국 항로는 크게 중국 산둥 반도에서 출발하여 한반도 중부 이남의 황해 연안을 거쳐 일본으로 넘어가는 '연근해 항로'와, 한반도 남쪽에서 쓰시마를 경유하거나 제주도를 멀리 바라보고 오가는 '동중국해 항로' 두 가지가 있었다. 동중국해 항로는 다시 '횡단 항로'와 '사단(斜斷) 항로'로 나뉜다(98쪽 지도 참조).


장보고 선단의 항로는 당시 항해술이나 조선술의 수준을 고려해 '연안 항로'(해안선 20km 이내에서 항해하는 항로)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윤박사의 조사·연구 결과 이는 잘못된 추측임이 드러났다. 연안 항로는 조류의 영향을 받아 국제 교역에는 적당치 않다는 것이 실증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유력하게 떠오른 항로가 해안에서 40∼50km까지 진출해 멀리 육지를 바라보고 항해하는 '연근해 항로' 와, 청해진을 중심으로 동중국해를 횡단(또는 사단)하는 항로. 윤박사는 "당시 중국에서는 재당 신라인이, 그리고 한반도 일대에서는 본국 신라인이 물길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 점이 장보고 선단을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무역 세력으로 부상케 한 원인이 됐다"라고 설명했다.


장보고재단은 오는 10월께 한국무역학회와 공동으로 '21세기 무역과 장보고'라는 주제로 국제 학술회의를 열 예정이다. 해양수산부는 지난해 학술·기념물·문화·교육·홍보 등 총 5개 분야에 걸쳐 10년간 추진할 '장보고 사업 기본 계획'을 확정했다. 이들 사업의 핵심은, 시대를 앞서간 장보고의 감각·진취성·개척 정신을 이어받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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