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도보 순례] 지리산·섬진강 '중병'
  • 이문재 취재부장 (moon@sisapress.com)
  • 승인 2001.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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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잡이 개발·바닷물 역류 등으로 '만신창이'

 
11일 동안 지리산을 반 바퀴 도는 사이 도보 순례단은 하루도 빠짐없이 공사 현장을 지나쳤다. 지리산 북부를 휘감아 돌아 진주로 내려가는 엄천강-경호강-남강 줄기에는 상류 지역의 난개발로 인해 지난 4월 초 상상도 못하던 녹조 현상이 나타났다.

최후의 청정 수계라고 불리던 섬진강도 마찬가지다. 엄천강이 그렇듯이, 섬진강도 상류는 오폐수 유입으로 4급수 이하라고 알려져 있다. 하류로 내려오며 지리산 계곡물이 섞여드는 덕분에 물이 맑아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섬진강에는 바닷물이 역류하고 있다. 상류에 세워진 댐이 섬진강으로 물을 방류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물을 빼내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모래를 많이 파내 강바닥이 낮아졌기 때문이라고 주민들은 지적한다.

하동읍 섬진교 바로 위쪽에서 재첩을 채취하는 서정순씨(49)는 "도다리·농어·우럭까지 올라오고 파래가 생긴다. 바닷물이 여기까지 올라오면 재첩 생산이 줄어든다. 큰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하동 주민들은 섬진강 생태계 변화말고도 올 초부터 불거진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 문제로 긴장하고 있다.

 
지난 1월, 공식으로 제기된 핵폐기물 처리장 부지는 현대제철이 들어서려 했던 갈사만과 금오산 두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난 2월 하순 유치운동 단체가 발족되면서 유치하자는 쪽과 '결사 반대'하는 진영이 갈등을 빚어왔다. 핵폐기물 처리장 반대 대책위를 주도하는 하동민주청년회에 따르면, 지역 여론은 대부분 '결사 반대' 분위기이다. 전국 47개 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한 핵폐기물 처리장 유치 신청은 오는 6월 말 끝나는데, 5월 초순 현재 단 한 군데도 나서지 않고 있다.

악양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희남재를 지리산 순환 관광도로로 개발한다는 소식도 최근 알려졌다. '자연의 친구들' 대표 차준엽씨는 "성삼재에서 관광도로의 역기능이 여실하게 드러났는데, 희남재까지 포장한다면, 지리산은 또다시 두 동강 난다"라고 말했다. 댐·순환 관광도로·핵폐기물 처리장·골프장·위락시설·공장·축사·생활 오폐수…. 지리산은 전방위에서 개발지상주의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서점에 <걷기 예찬>이 나와 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 사회학 교수인 다비드 르 브르통이 쓰고,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인 고려대 김화영 교수가 한국어로 옮겨 현대문학사에서 펴낸 이 책은, 걷기가 몸에 좋으니 하루에 몇 분씩은 걸어야 한다는 건강 서적이 아니다. 걷기를 통해 자기 삶의 길 위에 올라서야 한다는 ‘길의 연금술’이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걷기를 말살하는 도시 문명을 비판하면서, 걷기에 관해 글을 쓴 동서양의 저자들과 함께 길을 떠난다. 브르통은 위대한 도보여행가들과 함께 과거로 출발하지만, 그의 도착지는 몸이다. 브르통이 보기에, 오늘날 도시인의 몸은 거의 실신 상태다.


현대 문명은 몸의 기능의 확장이다. 걷기는 자전거에서 자동차와 비행기로, 보기는 망원경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진전을 거듭했다. 던지기는 활에서 총을 거쳐 미사일로 발전했고, 대화는 전화기에서 핸드폰, 인터넷으로 대체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몸이 확장되는 사이에, 정작 몸은 급속도로 퇴화하고 있다.

브르통은, 인간의 조건은 이제 움직이지 않는 앉은뱅이의 조건으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자아의 존재감이 감소하고 사물에 대한 인식의 폭이 협소해진다는 것이다. 이같은 역진화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바로 걷기이다. 걷는 사람은 걷는 동안은 오직 자기 몸으로 살아 있으며, 자기 몸으로 자기 자신 혹은 세계와 교감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주도권이 걷는 자에게 돌아온다.

이 책은 유럽을 도보로 횡단한 영국 젊은이 등 위대한 도보탐험가를 뒤따라가는 한편 바쇼·루소·니체·랭보·소로·카잔차키스·피에르 상소 등 ‘느림의 아버지’들과 수시로 동행하며 걷기가 일으키는 화학적 변화를 묘사한다. 그래서 간혹 걷기 혹은 길의 잠언집처럼 보인다.

자동차 시속과 컴퓨터 전송 속도에 민감한 속도 제일주의자가 보기에, 걷기는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하지만 시속 100km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는 7번 국도 주변과, 반바지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거닐며 바라보는 고향의 저녁 풍경이 얼마나 다른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걷기를 찬양하는 책 앞에서 냉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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