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생태론은 '철학' 아닌 '운동'
  • 구승희(동국대 교수·사회철학) ()
  • 승인 2001.07.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캐롤린 머천트 교수의〈래디컬 에콜로지〉/
환경 문제 돌파구 찾는 '급진적 이론' 제시


생태학적 상상력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특히 철학·사회학·정치학과 결합하면서 더욱 증폭되고 있다. 근대 세계에서 주체-강화, 지배-강화를 주도해 온 이들 학문 분과는 최근 20∼30년 사이에 빠르게 떠오르고 있는 '생태학적 사유'와 결부되면서, 심지어는 과거 그들이 성취한 이성적 기획의 귀결들을 전면 부인하는 당혹스러운 주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현대 생태 사상에는 세 조류가 있다. 모든 유형의 인간중심주의와 테크놀로지 및 문명을 비판하는 심층생태론, 위계 질서와 사회적 억압 구조를 비판하는 것이 생태계 복원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생태론, 자연=여성, 자본주의=남성이라는 성적 지배를 비판하는 생태여성주의가 그것이다. 이들은 공히 녹색 외투를 걸치고 나오지만―그래서 동일한 비판 대상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실은 누가 더 생태지향적인가를 놓고 서로 적대적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없는 시대의 사회 변혁 운동이 맞닥뜨리게 되는 필연적인 상호 착종일지도 모른다.


1980년 〈자연의 죽음〉이라는 책으로 일찌감치 명성을 떨친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의 캐롤린 머천트 교수의 책 〈래디컬 에콜로지〉가 나왔다. 이 책은 현대 생태 사상의 세 흐름을 비판적으로 종합함으로써 산업주의로부터 등장한 환경 문제의 돌파구를 모색하는 운동 강령적 성격을 띠고 있다.


머천트, 마르크스주의에 생태주의 연결


그녀 역시 생태여성주의의 고전 이론가이지만, 이네스트라 킹·프랑수아즈 도본느·발 플럼우드·프레야 메튜즈 등과 달리 사회생태론과 여성주의를 결합하기보다는 여성주의와 결합된 생태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 연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적이고 진보적이다. 그래서 그녀는 남성의 여성 지배를 자연 지배와 등치시키고, 생태계 문제 전반을 '남성 때문'으로 환원하는 매우 포괄적인 세계관적 기획인 여타 생태여성주의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지구 생명-유지 체계'를 위협하는 근원을 '자본주의 가부장제적 세계 체제'라고 보는 데에는 다른 생태여성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지만, 그녀는 그 해결책으로 '영성' '여성성'을 거론하지 않는다. 그 대신 '생산력' '생태학적 조건' '인간의 재생산 조건' 내에서 해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입장을 '급진적'이라고 특징지운다.


머천트는 급진 생태론이란 '인간이 자연을 보살피고, 인간을 보살피는 새로운 윤리를 추구하면서 새로운 사회적 전망과 윤리에 부합하는 변화를 모색'하는 사회운동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급진 생태론은 아직 체계적인 '이론'으로 정형화되지 못하고,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류 환경·생태 사상과 그 운동 방식에 대한 비판에 집중한 나머지, 서론과 결론에서 그려내는 급진 생태론의 초벌 그림은 어떤 대안적 세상에 대한 전망을 보기에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급진적 생태론이 생태 '철학'이 아니라, 사회 '운동'일 바에는 강령적인 일관성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심층생태론·사회생태론과 대결하기보다는, 이념적으로 결합함으로써 '포괄적인 생태·사회 운동'으로 역동성을 제고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이 그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해 본다.만들어 쓰지 않고 사서 쓰는 세상. 집까지도 건설업체가 판매하는 ‘제품’이다. 집주인은 집을 지은 사람이 아니라 소유자, 아니 소비자이다. 집은 집주인의 삶이 담겨 있는 ‘이력서’가 아니라 부동산일 따름이다. 집에 대한 고정 관념이 이러할진대, 옛 선비들이 거닐던 정원을 기웃거리는 일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빈틈없는 삶일수록 여백을 만들어야 한다. ‘24시간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옛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몸과 마음을 다스렸던 정원은, 두고 온 고향, 혹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자연 같은 존재다.



한국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화재 감정위원을 거쳐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책임편수연구원으로 있는 허 균씨가 최근 발간한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이갑철 사진, 다른세상 펴냄)는 선비들이 담을 두르거나 연못을 팔 때, 바위를 세워놓을 때, 거기에 어떤 생각을 담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한국의 정원은 중국이나 일본의 정원과 비교할 때 고유한 특징이 드러난다. 중국 정원이 주인에 의해 연출된 규모가 큰 연극 무대라면, 일본의 정원은 인간 중심적이고 작위적인 구성이 강하다. 반면 한국의 정원은 자연과의 경계가 희박하다. 허 균씨에 따르면, 한국의 옛 정원은 산세, 계류의 흐름, 바위와 수목의 상태 등 산천의 형국을 더듬어서, 그 중 경관이 좋은 한 대목을 골라 거기에 약간의 쉼터를 짓고 나무와 돌을 정돈한 것이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부분은 정원 속의 경물·조형물·자연물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를 읽어내고, 뒷부분에서는 한국 정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정원 스물여덟 군데를 찾아간다. 한국의 정원에는 유교와 성리학, 도가와 신선사상, 풍수사상이 깃들어 있으며 연꽃이나 연못, 바위와 괴석에는 우주의 운행 원리가 깃들어 있다. 은행나무는 공자를, 소나무·대나무·매화(세한삼우)는 군자의 덕목을 은유한다.
올 여름에는 이 책을 지도 삼아 옛 정원들을 순례해볼 일이다. 우주와 교감하며 ‘독락(獨樂)’하던 선비의 인문학적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