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문화 빗장 푸는 명해설가들
  • 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1.09.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술의 빗장 푸는 '마술 같은 입담'/
음악·미술·오페라·발레 명해설가들/
고급 무대로 대중 이끄는 '탁월한 안내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격언이 있지만 문제는 '예술이 너무나 멀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오페라·발레·국악 공연·클래식 콘서트·미술 전시회 같은 곳에 웬만해서는 발길이 쉽게 가지 않는다. 큰 마음 먹고 찾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더 멀어지기 쉽다.


다행히 최근 들어 일반인에게 이런 고급 예술을 쉽게 해설해 주는 무대가 많이 생겨나고 있다. 아직까지 고급 예술 관객의 저변이 넓지 않은 터라 무대와 객석을 이어주는 해설가들의 존재는 매우 소중하다. 명해설가로 꼽히는 다섯 사람을 만나 보았다.




오페라 연출가인 조성진 세종문화회관 예술감독(55)은 우리나라 오페라 해설의 일인자이다.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시절부터 그는 '오페라는 재미없고 괴로운 것'이라는 선입견을 없애려고 꾸준히 노력해 왔다. 조감독은 오페라를 보러 오는 관객에게 먼저 긴장을 풀라고 말한다. "눈과 귀만 가져오면 모든 준비는 끝난 것이다. 오페라는 그냥 보고 감상하면 된다. 느낌에 우열이란 있을 수 없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는 해설자가 변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파란 하늘을 보고 있는데 하늘이 파랗다고 말하는 것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그냥 하늘을 보라고 말하면 된다." 가장 재미없는 해설은 지식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음악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맛처럼 직접 느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해설자는 관객을 산 정상에 데려다 주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알려주는 사람이다. "헬리콥터 타고 산 정상에 잠시 내렸다 가는 것을 두고 산에 올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루 사이에 산을 다 볼 수 없듯이 오페라를 한 번 보고서 전부 즐길 수는 없다." 오페라가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좋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해주면 그것으로 해설자의 역할은 끝이라는 것이다. 오페라를 비평할 수 있을 만큼 훈련받은 관객이 늘면 공연 수준도 그만큼 올라간다는 그는 "오페라는 본래 귀족과 평민이 함께 즐겼던 대중 예술이다. 악극을 즐기듯이 오페라도 즐길 수 있다"라고 말한다.


1995년 발레 대중화를 선언하고 창단한 서울발레시어터 김인희 단장(38)은 무용단 공연이 있을 때마다 마이크를 잡는다. 1996년 대학로의 한 소극장 공연에서 처음 시작한 해설을 지금까지 거르지 않고 이어오고 있다.


무용수 숫자가 적던 그 시절, 그녀는 무대에 계속 올라야 하는 단원들에게 쉴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해설을 시작했다. 그런데 결과가 기대 이상이었다. 사람들이 무용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관심을 온몸으로 느낀 무용수들이 고무되면서 공연의 질이 더 높아졌다.


김단장은 해설을 끝내고 나면 몇 가지 발레 마임을 가르친다. 신체의 움직임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가는 기쁨을 느끼면 다음에 또 공연장을 찾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발레 공연에 품바 타령이나 흘러간 가요를 과감히 차용하는 김단장은, 해설할 때에도 관객과 눈높이를 맞춘다. 어린이 발레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해설할 때는 젤러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분장까지 하고 나왔다.


김단장은 작품에 대해서 단정하지 않고 관객을 위해 여지를 남긴다. 그녀가 주문하는 것은 한 가지. '무용수의 땀방울을 보고 거친 숨소리를 들으면서 삶의 에너지를 느끼라'는 것이다.


국악 전문 해설가 "해설은 퍼포먼스"




위 왼쪽부터 세종문화회관 조성진 예술감독, 국립창극단 최종민 단장, 서울발레시어터 김인희 단장, 미술 전문 MC 한젬마씨.


1965년부터 방송에서 국악을 해설하고 있는 국립창극단 최종민 단장(59)은 해설에 관한 한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 신들린 듯한 그의 해설은 마치 공연의 일부처럼 느껴질 정도다. 해설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생각하는 그는 직접 실연해 보이며 국악이 얼마나 우리 몸에 맞는지 사람들에게 일깨운다.


공연과 청중을 연결하는 끈이 되어 주되 그는 관객이 스스로 듣고 발견할 여지를 침범하지 않는다. 최단장은 관객에게 "당신은 이미 훌륭한 청중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공연을 즐기라"고 말한다. 해설에 대한 그의 지론은 '과유불급'이다. 공연에는 앙코르가 있지만 해설에는 앙코르가 없다는 것을 그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사람들은 공연을 들으러 온 것이지 해설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다. 해설하는 목적은 해설이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해설은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만큼만 해야 한다. 일장 훈시는 필요 없다."


단 더 많이 듣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고 그는 말한다. "배추가 자라는 것을 보면 겉껍질이 먼저 에워싸고 나중에 속이 찬다. 해설자는 겉껍질을 키워주는 일을 할 뿐이다. 속을 채우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요즘 클래식 공연장이나 미술 전시관에서는 20∼30대 관객을 많이 볼 수 있다. 고급 예술에 대한 젊은 사람들의 관심이 이렇게 커진 데에는 미술 전문 MC 한젬마씨(31)나 음악 평론가 장일범씨(33)와 같은 신세대 해설가들의 공이 크다. 이들은 텔레비전과 책을 통한 전방위 해설로 젊은 관객들의 귀와 눈을 열어 주고 있다.


서울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한젬마씨는 MBC 〈문화 매거진〉과 케이블 방송 KTV 〈문화 마당〉에 출연하고 있다.


그녀는, 해설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자랑해서는 안되고 관객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시장에 갈 때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하는지, 무슨 선물을 하는 것이 좋은지, 그림을 볼 때 몇 cm 앞에서 보아야 하는지, 이제까지는 관객들이 궁금해도 차마 묻지 못했던 그런 것들이다.


긴장이 풀리면 관심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 이야기를 해도 늦지 않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제상 앞에서 절할 때처럼 남들 따라서 움직이지 말고 보기 좋은 그림 앞에서 머무르고 관심이 없는 그림은 그냥 지나치라"며 자신의 취향대로 줏대 있게 행동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지간해서는 '교과서 미술'의 한계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림에서 정답을 얻으려고 하는 이들은 그림이 한눈에 다 보이는 '쪽집게 강의'를 부탁하기도 한다. "현대 미술은 너무 어려워. 제목이라도 붙여주면 좋으련만 무제가 뭐야. 자기도 모르겠다는 얘기인가"라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다. 간혹 투자를 위한 전문적 분석을 요구하는 주부 컬렉터들도 있다. 이런 이들에게는 "많이 보면 안목은 저절로 키워진다"라고 말하고 빠져나오기도 한다. 모든 불평을 귀담아 들으면서 하나하나 그림을 설명하는 한씨는 자신의 홈페이지(artjemma.com)를 통해서 애프터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많이 듣고 보면 안목은 저절로 생긴다"


장일범씨는 요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으로 전성기를 누리는 해설자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성악을 전공한 장씨는 월요일에는 MBC FM 〈윤상의 음악 살롱〉의 '어느 멋진 날', 화요일에는 KBS FM 〈저녁의 클래식〉의 '장일범의 음악 오디세이'에 출연하고 목요일에는 EBS 〈오후의 음악선물〉 진행을 맡고 있다.


그는 해설이야말로 잠재된 관객을 개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말주변이 좋은 편이지만 되도록 말을 아낀다. "처음에는 무조건 많이 얘기하려고 했지만 점차 불필요한 얘기는 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강의를 듣기 위해서 공연장에 온 게 아니다." 그는 관객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졸리면 주무세요"라고 말한다.


음악 전문지 기자 출신답게 연주자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사람 얘기를 곁들여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곡에 대해서만 설명하면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 음악을 둘러싼 문화사를 개괄해서 설명한다. 사변적이지 않고 재미있게 들을 수 있도록 농담을 곁들인다." 관객이 연주자의 호흡을 따라갈 수 있도록 그는 긴장과 이완의 선을 매끄럽게 연결해 준다.


해설이 있는 무대를 통해 훈련된 관객이 배출되면서 좋은 공연을 찾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클래식은 유행을 타지 않아 평생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이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깊이가 있다. 좋은 공연도 접하고 덤으로 센스 있는 해설까지 즐긴다면 가을이 더욱 풍요하겠다. 쓸쓸한 두 영혼의
희한한 멜로-김소희



높이뛰기라는 스포츠는 특이한 데가 있다. 종목 자체가 화려한 구석이라고는 없을 뿐더러 선수 대부분이 일정한 높이 이상을 넘지 못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자빠진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종목에 자신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의 어떤 이는 올림픽에 나가 새처럼 날아오르는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오아시스>는 전과 3범인 정신 산만한 남자와 중증 뇌성마비 여자의 멜로 드라마다. 그걸 누가 보려 할까. ‘생각 잘 해가며 사는’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머리통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홍종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왔다갔다하는 인물이다. 멀쩡한 중에 멀쩡한 한국의 톱스타가 어떻게 그런 캐릭터를 뽑아낼 수 있을까. 여배우는 또 얼굴과 온몸을 극도로 일그러뜨리는 한공주 역을 하려 할까. 설혹 배우가 했기로서니 관객이 그런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걸 해내는 희한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높이 이상으로 날아올랐고, 보는 이는 그 아름다운 감정의 비상을 따라가느라 마음이 아프다.


최근에 <아귀레, 신의 분노>를 만든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냉정한 광기에 대해 여러 글들이 나왔지만 이창동 감독의 집중력 또한 전설이 될 만하다. 무슨 심사였는지 스태프와 배우들을 악착같이 괴롭혔다는 뒷이야기가 충무로에 떠돌았다. 네 번이나 촬영하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찍었다거나,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 대목에서 밤새 연기를 되풀이시키는가 하면,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서 끌어내 어깨에 메라고 하면서도 움직이지는 말라고 했다는 식이다.


왜 그랬을까. 이제 보니 <오아시스>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은 이창동이 꾸며낸 것이 아니라 그가 오래도록 사람들을 관찰한 끝에 머리 속에 쌓아둔 데이터였던 것 같다. 감독의 머리 속에는 캐릭터와 그들의 움직임, 시선, 감정 들이 마치 눈앞에 보듯 생생하게 있었을 것이고, 배우와 스태프가 자기 머리 속에 있는 것들에 근접해 들어오도록 끊임없이 주문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창동이 배우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그려내게 하고 싶었던 것은 캐릭터의 표면이 아니라 영혼이다. 한겨울에 감옥에서 막 출소한 여름옷 차림의 홍종두는 식구들이 어디론가 이사해 버리고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자 가게에 들어가 스스로 두부를 사서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우물우물 베어먹는다. 그 얼굴은 그리 슬프지도 않고 분노는 더더구나 없지만, 외로움에 익숙해진 사람이 그래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렸던 그 쓸쓸함이 번져 나온다.


이창동은 1980년대의 시대 정신에 온기를 불어넣어 2000년대의 시대 정신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그의 눈을 통해서 이 세상 어두운 곳 어딘가에 떠밀린 채 작게 타오르고 있던 두 영혼의 촛불이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실의 절망 담은
가혹한 리얼리즘-김봉석



나는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는 대부분 천편일률적이라고 생각한다. 장애를 박차고 일어난다는 인간 승리의 관점에서 그리거나, 순수나 동심의 상징으로 장애인을 등장시키는 게 나는 싫다. 그 영화들은 장애인이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오아시스>를 크게 기대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과자와 장애인의 사랑이라는, 현실에서 극히 일어나기 힘든 경우. 그래서 더욱 힘들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마침내 사랑이 이루어진다. 감동적이겠지만, 좀 씁쓸하겠지.


전과자인 종두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공주의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공주 혼자 집안에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꼬물거리는 모습을 보는 일은 불편하다. 종두가 공주에게 ‘너 참 예쁘다’고 말해주고, 공주가 종두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갈 때 보이는 환해진 얼굴을 보는 일은 더 불편하다. 그들의 사랑은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종두와 공주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인정하지 않는 존재다. 공주의 오빠는 공주를 홀로 남겨놓고 장애인 아파트로 이사했다.

종두의 가족은 종두에게 알리지도 않고 이사를 갔다. 공주와 종두가 당장 어디론가 사라져도, 누구도 찾거나 애달퍼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버림받은 존재이고, 상처 입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