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영산강 옹관묘 '비밀의 문' 열리다
  • 나권일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2001.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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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서 대형 옹관 가마터 발견…
"고대사 바로잡을 획기적인 유적"
전남 나주 반남 고분군과 다시 복암리 고분 등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삼국 시대 대형 옹관묘(독무덤)는 고고학계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였다. 크기가 2m, 무게가 100kg이 넘는 대형 옹관들이 어디서 제작되어 어떻게 운반되었는지 규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무덤을 조성할 때마다 흙을 쌓은 임시 가마에서 옹관을 만들고, 옹관이 너무 크기 때문에 가마를 깨고 무덤으로 옮긴 뒤 가마터는 바로 폐기했을 것이라는 '1회용 임시 가마설'로 겨우 설명했을 뿐이다.




옹관 가마터 : 전남 나주시 오량동에서 유적을 발굴한 동신대 박물관 이정호 교수. 왼쪽은 위에서 내려다 본 가마터 유적.


그러나 최근 대형 옹관 제작 과정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는 옹관 가마터가 열아홉 군데나 집단으로 발견되면서 학계가 흥분하고 있다. 가마터가 발굴된 곳은 나주시 오량동 해발 20m 구릉지대로, 다시 복암리 3호분 고분과는 2km, 반남 고분군과는 6km 떨어진 지역이다.
가마터를 발견하게 된 과정도 흥미롭다. 땅 주인이 야산을 묘지 공원과 과수원으로 조성하려고 굴삭기로 파헤치다가 옹관 파편들이 드러난 광경을 때마침 GPS(인공위성 위치 측정 시스템)로 문화 유적을 찾고 있던 동신대 박물관(책임교수 이정호) 팀이 발견해 공사를 중단시키고 급히 발굴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삼국시대의 대단위 토기 산업단지"


동신대와 목포대 박물관(관장 최성락)이 공동으로 지난 8월10일부터 열흘 동안 시험적으로 가마터 한 곳을 시굴한 결과는 엄청났다. 발굴된 가마는 길이 9m, 너비 2.2m, 깊이 75cm인데, 장작으로 불을 때던 연소실과 그 불길로 옹관을 굽던 소성실이 1천5백년 전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양호하게 보존된 가마 내부에서는 다양한 무늬의 옹관 파편이 수없이 발견되었다. 뾰족한 주둥이 토기, 쇠뿔 모양 손잡이 토기 등도 함께 출토되어 옹관과 토기를 함께 굽던 가마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특히 발굴된 유물 가운데 옹관과 토기 파편은 복암리 고분 출토물과 일치했다. 토기를 빚을 때 모양을 잡거나 무늬를 넣을 때 찌그러짐을 막는 도구인 토제모루까지 나왔다.


발굴팀은 이 가마터가 5∼6세기에 영산강 유역을 지배하던 세력이 관리·운영하던 '관요(官窯)' 성격의 유적이며, 옹관과 토기는 영산강 수로로 운송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가마터 주변에 점토 채취장과 옹관을 빚은 공방터, 공인들의 주거지와 운송로인 나루터 등 다양한 유적이 널려 있을 것으로 보고 정밀 발굴 조사에 들어갈 계획이다.


동신대 박물관 이정호 교수는 "오량동 지구에는 최소 30∼40여 기, 최대 100여 기의 옹관과 토기 가마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고도의 토기 제작술을 보유한 삼국 시대의 대단위 산업단지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성낙준 국립김해박물관장은 "의문으로 남아 있던 옹관 고분 제작에 관한 숙제를 풀 수 있는 유적이다"라고 평가했다. 지건길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올해 유적 조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치켜세웠고, 서울대 최몽룡 교수는 "복암리 3호분 옹관과 반남 대안리·덕산리·신촌리 옹관이 모두 오량동 가마터에서 제작·생산·공급되었을 것이다"라고 추정했다. 이들은 오량동 가마터가 고대사 연구의 발판이 되는 획기적인 유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하루빨리 국가사적지로 지정해 정밀 학술 조사를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나주시는 올해 추경예산에 5천만원을 급히 배정해 추가 발굴을 실시할 계획이다. 그리고 가마터를 우선 전라남도 지정 사적지로 '가지정'을 신청한 뒤 국가사적지로 지정받기 위한 절차를 밟을 계획이다.침묵과 소란의
대위법적 조화-김소희



시사회에 다녀온 지 2, 3일 이내에 평을 쓰곤 하던 때와 달리 <기쿠지로의 여름>을 본 지는 열흘쯤 되었다. 가만히 앉아 그 영화를 떠올려 보니 라벨의 <볼레로>를 들을 때처럼 어떤 단순한 리듬들이 오래도록 반복되었던 것 같은 느낌이 남아 있다.


사실 그랬다. 쉰 살쯤 된 아저씨가 아홉 살짜리 꼬마와 함께 길을 떠나 계속 코미디 같은 장난을 벌이다 집에 돌아오는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전반부는 철없는 아저씨가 꼬마를 궁지에 몰아넣는 분위기다. 그러나 엄마를 찾아 나선 꼬마가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 후반 이후에는 아저씨가 꼬마를 즐겁게 해주려고 고안해낸 여름방학 놀이 퍼레이드가 전개된다.


문제는 그 아저씨가 기타노 다케시라는 데 있다. 비트 다케시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일본 개그계의 지존이자, 어쩌다 메가폰을 잡은 이래로 대부분의 영화에서 시나리오 작가, 감독, 주연을 겸하면서 칸이나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도 하나씩 받아오는 그 감독 말이다.


대위법의 요소들은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질적이지만 함께 붙여서 연주하면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야쿠자 출신에 이제는 아내에게 빌붙어 지내면서 동네 소년들이나 괴롭히는 50대 기쿠지로. 일하러 나가는 할머니가 차려놓은 외로운 밥상을 매일 마주하는 아홉 살 마사오. 기타노 다케시는 이 둘을 붙여서 따뜻하고 희망 섞인 코미디를 엮어 간다.


두 인물 간의 화음을 뒷받침하는 정서는 쓸쓸함이다. 아빠가 세상을 떠난 뒤 엄마는 ‘돈 벌러’ 나가고 할머니와 단둘이 생활하는 어린 마사오의 얼굴은 해맑기는 해도 외로움과 그리움, 소외감에 오래도록 지친 자취가 역력하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엄마를 찾아주겠다며 보호자가 된 기쿠지로는 평생토록 아이는커녕 자신의 인생조차 단 한 순간도 책임감 있게 돌보아본 적이 없다는 흔적이 뚜렷하다.


습관처럼 아무 생각 없이 아이를 데리고 떠돌던 기쿠지로는 우연히 아이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한다. 세상이 요구하는 경쟁력과 전혀 무관하던 기쿠지로의 머리 속은 아이를 즐겁게 해줄 아이디어가 가득 담긴 보물 창고로 돌변한다. 이렇게 해서 사랑을 갈망하던 두 영혼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불이 켜진다.


기쿠지로는 기타노 감독의 아버지 이름이라고 한다. 그는 황량한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 아버지와 함께 물놀이를 갔던 단 한번의 기억이 머리 속에 남아 있다고 했다. 천재 감독으로 불리는 장년의 그가 초록 빛깔 나는 유년의 문제로 돌아간 것은 어린 시절 단 한 번 켜졌던 관심의 불꽃이 기억 속에서 다시 타올랐던 것이 아닐까. 정지와 액션, 침묵과 소란함, 쓸쓸함과 장난스러움, 무관심과 애정의 대위법 역시 이 영화가 범작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 위의 휴가-김봉석



본에서는 기타노 다케시, 아니 비트 다케시를 엔터테인먼트의 신이라고 부른다. 기타노 다케시는 영화 감독으로 활동할 때 사용하는 본명이고, 대부분의 경우는 비트 다케시라는 예명을 사용한다. 일본 사람이 알고 있는 비트 다케시는 시침 뚝 떼고 허무맹랑한 농담이나 독설을 던지거나, 히죽거리며 바보짓을 하는 코미디언의 모습이다.


국내에 개봉되었던 <소나티네>와 <하나비>의 기타노 다케시를 보고 있으면, 차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저렇게 비장하고, 세상의 모든 고민을 홀로 짊어진 듯한 남자가 가장 웃기는 코미디언이라니. 한국 관객이 알고 있는 기타노 다케시는 거의 한 가지 표정뿐이다.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는, 피로와 환멸만이 가득한 얼굴.

그것은 기타노 다케시의 천 가지 얼굴 중에서 하나의 얼굴에 불과하다. 일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타노 다케시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기쿠지로의 여름>이다.


아이들의 얼굴처럼 해맑은 <기쿠지로의 여름>은 기타노 다케시의 여름 방학 같다. 엄마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 소년 마사오와 동행했다가 자신의 잃어버린 동심을 찾게 된 기쿠지로처럼, 기타노 다케시는 독설과 분노가 가라앉은 그윽하고 다정한 눈매를 드러낸다.

<기쿠지로의 여름>이 선보이는 장기는 영화 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트레이드 마크인 고요 속의 폭발이 아니라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의 좌충우돌이다. <하나비>로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받고 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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