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아름다운 광고에 침을 뱉으마
  • 김은남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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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문화 무시·조롱하는 '안티 광고전'/
'도발적 미학'으로 젊은층 사로잡아
보기에도 '범생이' 같은 남자가 있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 꼭 여민 셔츠 깃. 그의 사진 상단에는 '체크 인'이라고 쓰여 있다. 호텔에 투숙하려는 남자인가 보다. 다음은 그의 '체크 아웃' 장면. 그런데 어럽쇼, 이게 웬일인가. 좀전의 단정했던 남자는 간 곳이 없다. 헝클어진 머리, 부어오른 눈, 목에 난 검은 멍 자국. 영락없는 뒷골목 부랑배이다.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동성 간의 키스 : 정형화한 가치를 거부하는 디젤 진 광고(맨 왼쪽)와 키치적 자유 분방함으로 충만한 리바이스 광고(왼쪽)는 새롭고도 낯선 미학적 경험을 안겨준다.


이른바 '안티 광고'의 깜찍한 도발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을 선전하는 이 광고는 '우리집에서 묵고 나면 심신이 개운해져요' 따위 상투적인 호객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호텔을 나서면서 더 망가지고 피곤해 보이는 고객을 보여줄 뿐이다.


기존 광고 문법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조롱하는 광고. 이것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9월11일∼10월11일 서울 홍대앞 쌈지스페이스 갤러리에서 열리는 '안티 광고전'을 통해서이다. 전시회를 기획한 김홍탁씨(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광고 평론가)는 안티 광고라는 용어를 국내에 처음 유통시킨 주인공이다. 이를 자신의 신조어라고 여기던 김씨는 올해 칸 광고제를 관전하다가 깜짝 놀랐다. 의류 제품인 '디젤 진' 캠페인 시리즈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제작자 요아킴 요나슨이 자기네 캠페인을 반(反) 주류 안티 광고라고 소개했기 때문이다.


안티 광고가 세계적인 조류임을 확신한 김씨는 관련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결과 관객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광고 전시회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광고계의 경우 공모전은 있어도 순수한 작품 전시회는 드물다). 그는 안티 광고의 슬로건을 여섯 가지로 요약한다. △제품을 죽여라 △화려한 모델을 죽여라 △매체를 죽여라 △논리를 죽여라 △착한 척하는 감성을 죽여라 △거짓말을 죽여라.




컬트 또는 엽기 : 장애인 여성이 등장한 구두 광고(맨 오른쪽)와 커셀과 크래머의 호텔 광고(오른쪽). 종업원이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모닝 콜'을 대신하는 이 호텔은 유럽 최고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아름답고 영원할 것 같은 인간은 안티 광고에 등장하지 않는다. 슈발루라는 구두 광고를 눈으로 쫓던 소비자는 기가 질리고 만다. 매혹적인 여성 모델의 왼쪽 다리가 무릎 아래에서 툭 잘려 있기 때문이다. 구두 광고에 장애인이라니, 충격적인 발상의 전복이다.


디젤 진 광고 또한 정형화한 인물이나 상황을 뒤집어 놓기로 유명하다. 크리스마스 전야, 가족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단란한 거실 풍경. 그러나 자세히 보면 소파에 앉은 사람은 흑인 가족이요, 시중을 드는 하인은 백인이다. 부두에 들어선 군함 앞에서 열렬히 키스를 나누는 연인은 둘 다 남자이다.


이들 광고는 또 텔레비전·신문 등 전통적인 매체에 얽매이지 않는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맥루한의 언설을 이들은 광고로 육화해 보여준다. 앞서의 호텔 광고를 제작한 네덜란드 광고계의 악동 커셀과 크리머는 나이키가 네덜란드 축구 대표팀의 후원자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기발한 홍보전을 고안했다. 경기 전야 아르바이트생 2백명을 동원해 교통 신호등마다 나이키 로고를 부착한 것이다. 다음날 출근길에 나선 시민들은 오렌지색 신호등이 들어올 때마다 선명하게 빛나는 나이키 로고를 볼 수 있었다(오렌지색은 네덜란드 국가 대표팀을 상징하는 색상이기도 하다).


"광고가 주입해온 거짓말에 넌덜머리 난다"




국내에서도 1990년대 말 박명천이라는 걸출한 광고 감독이 등장하면서 안티 광고의 계보가 형성되었다. 서로 쥐어뜯다 말고 비좁은 골목길로 달아나는 10대 양아치 2명. 막다른 궁지에 몰린 이들은, 동네 어른으로부터 이렇게 훈계를 듣는다. "너희들, 자꾸 싸우면 초코바로 맞는다잉∼!"


초코바가 먹는 것이 아니라 남을 때리는 수단으로 등장한 것은 아마도 사상 최초이리라. 이 광고를 제작한 박감독은, 그 뒤에도 모호한 이미지로 가득한 TTL 광고, 밑도끝도 없이 "아버지, 난 누구에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016 NA 광고 등을 만들면서 안티 광고의 흐름을 주도해 왔다.


명확한 컨셉과 정보 전달을 숙명처럼 여겨 온 광고계에서 안티 광고는 분명 이단적인 존재이다. 여기에 거부감을 느끼는 광고주도 적지 않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그렇지만 전세계 젊은이들은 이같은 광고에 열광하고 있다. "이제껏 광고가 주입해온 거짓말에 넌덜머리가 난다"라는 요아킴 요나슨의 말마따나, 이들은 지금 주류적 질서와 가치·미학을 강요해온 기성 문화에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여성들에게 선뜻 돈을 빌려주는 은행이 있을까? 담보나 보증인을 요구하지 않는 데다, 갚지 못할 경우를 상정하지 않는 은행이 과연 있을까? 있다. 그것도 인구 밀도와 국가부패지수가 세계 최고인 제3세계에 있다. 1976년, 방글라데시의 경제학자 무하마드 유누스 교수가 세운 그라민 은행(그라민은 한국어로 마을이라는 뜻).




지난 26년간 그라민 은행은 방글라데시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 2백40만 절대빈곤층에게 약 3조3천6백억원을 융자했다. 이 가운데 42%가 가난을 벗어났고, 90% 이상이 대출금을 갚았다. 이 소액 융자 은행은 한국에서도 ‘신나는 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라민 은행의 성공 앞에서 가장 많이 놀란 사람들은 다름아닌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난에서 탈출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라민 은행은 급기야 세계의 정부라고 불리는 세계은행은 물론 선진국의 정치 지도자, 주류(거시) 경제학자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유누스 총재의 자서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정재곤 옮김, 세상사람들의책 펴냄)는 가난에 대한, 아니 인간에 대한 온갖 오해와 편견과 싸워 이긴 감동적인 기록이다. 유누스는 ‘우리는 꿈꾼 것만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라민 은행의 종자돈은 27 달러였다. 그 돈을 극빈자 42명이 꾸어갔다. 농촌 살리기 운동과 더불어 시작된 소액 융자 제도는 그러나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선뜻 마음을 열지 않았고, 제도권 금융과 관료주의도 유누스의 말에 귀를 열지 않았다.


이윤 추구 못지 않게 사회적 목표를 강조하는 그라민 은행의 성공은 자본주의가 신봉하고 있는 고정 관념을 뒤흔들고 있다. 우선, 현대 사회가 인간이나 인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지식이 매우 부족하며, 개개인이 저마다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책은 약자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는 관료들을 질책하는 한편, 절대 빈곤과 자립형 노동을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는 현대 경제학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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