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사제 수품 50주년 및 팔순 맞은 김수환 추기경
  • 이문재 편집위원 (moon@e-sisa.co.kr)
  • 승인 2001.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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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인간 존중"
"촛불처럼 타오르겠다"
성당을 빠져 나오는 데 10분 이상 걸렸다. 길이 열리지 않았다. 사제 수품 50주년(금경축)과 팔순 축하 미사에 참석한 2천여 신자는 명동성당을, 아니 추기경 곁을 떠나지 않았다. 평생 추기경님께 큰절 한 번 올리는 것이 소원이었다며 성당 바닥에 넙죽 엎드리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휠체어를 타고 온 할아버지도 있었다. '건강하세요'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인사말이 색종이처럼 뿌려지고 있었다.




모든 이를 위하여 : 1951년 9월15일 사제 서품을 받고 어머니 서중하 여사와 함께(맨 왼쪽). 50년 뒤 추기경은 존경받는 '시대의 어른'이 되었다.


지난 9월14일 오전 10시30분, 서울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축하 미사에서 서울대교구 정진석 대주교는 "추기경님께서는 우리 민족과 함께하면서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마다 복음의 빛으로 앞길을 비추어 주셨다"라면서, 존경받는 어른이 많지 않음을 한탄하는 이때 추기경이 한평생 올곧은 삶을 통해서 신자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미사는 축사와 예물 증정 순서에 이르러 흥겹고 넉넉한 잔치로 변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축하 메시지에 이어, 신도들의 존경과 정성이 하나하나 전해졌다. 서울대교구 평신도들은 추기경을 위해 미사 봉헌과 영성체 그리고 주교를 위한 기도를 각각 1백20만7천3백75번 드린다는 영적 예물을 올렸고, 추기경과 e메일을 통해 '사랑의 편지'를 주고 받았던 김희정씨가 축사를 낭독했다. 주교들은 추기경에게 작은 은촛대를 선물했다.


추기경이 "영적 선물로 백만 번이 넘는 미사와 묵주 기도·화살 기도를 올린다고 하셨는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면 내가 지은 죄가 무겁더라도 하느님이 봐주실 겁니다. 이걸 잘 보관했다가 죽을 때 가져가야겠습니다"라고 답사하자, 성당 내부가 일순 환해졌다. 사제와 신도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추기경은 자신의 삶을 주교들이 선물한 초와 촛대에 비유했다. "남은 생애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저 촛불처럼 나 자신을 사랑으로 태우며 마감하고 싶습니다."




1951년 9월15일부터 2001년 9월15일. 김수환 추기경이 지나온 저 50년은, 한마디로 압축하기가 쉽지 않다. 사제로서, 서울대교구장으로서,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서 살아온 50년은 '사제로서 가장 영예로운 날인 금경축'으로 요약할 수 있지만, 추기경은 교회 내부의 추기경만은 아니었다. 그는 시대의 전위이자 양심의 중심이었다. 추기경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었고,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는 표지판이었으며,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듬어 안는 둥지였다.


추기경의 생애는 '일치하는 생애'였다. 자기 자신과 하느님을 일치시키고, 교회와 하느님을, 교회와 현실을 일치시키려는 삶이었다. 추기경의 신학과 그 실천은 다음 두 문장을 발원지로 하고 있다. 50년 전, 사제가 되는 순간에 되뇌었던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일찍이 사목 표어로 삼은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사제 개인으로 돌아갈 때 추기경은 늘 자신이 죄인이 아닌가 돌아보았고, 시대의 양심이자 예언자로 나설 때면 늘 '너희와 모든 이'를 염두에 두었다.


민족이 처한 현실에 민감하게 대응


추기경은 교회 안과 교회 밖을 구분하지 않았다. 성장기에서부터 민족이 처해 있는 현실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김수태 교수(충남대·한국사)의 추기경론(〈교회와, 민족과 함께〉)에 따르면, 추기경은 성장기 시절부터 민족이 처한 현실에 민감했다. 동성학교 시절, 황국 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가 나왔을 때, 황국 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고 써내는 바람에 퇴학당할 뻔했고, 일본 상지 대학 유학 시절에는 '민족이 부른다면 정치가라도 되겠다'고 밝힌 적도 있었다. 1944년 학병으로 입대했을 때는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자영업자가 되어 스물 다섯에 장가를 들고, 서른 살에는 어머니께 인삼을 사드리겠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던 추기경은,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에 못이겨 1935년 동성학교에 입학해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1951년 사제가 된 추기경은 1956년 독일 뮌스터 대학에 유학하면서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인간과 세계를 보는 시각을 확립했다.


1964년부터 2년 동안 가톨릭신문사 사장으로 재직할 때 '사회 속에 존재하는 교회'에 대한 신념을 굳혔다. 당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는데, 추기경은 발행인이 아니라 '외신부 기자'가 되어 공의회 소식을 일일이 번역하고 기사화했다. 교회는 내적 쇄신을 통해 참다운 실재인 사회와 더불어 존재해야 한다는 공의회의 근본 정신을 사회 현실과 담을 쌓고 있던 한국 천주교회에 적용하려 했던 것이다.


지난 9월12일, 금경축과 팔순을 앞두고 추기경은 오랜만에 기자들과 만났다. 4년 전 서울 대교구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래 줄곧 머무르고 있는 혜화동 주교관 앞 가톨릭신학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추기경은 "지금 하나님 앞에 선다면 자랑할 일보다는 용서를 청할 일이 많을 것이다. 나는 죄인이다"라고 말했다. 50년 전 사제 서품을 받을 때 '나를 희생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돌아보니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추기경은 신자들과 함께 살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처음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던 안동 목성동 본당 주임신부 시절과 가톨릭신문사 시절, 그리고 마산 교구 시절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다 후회스럽다는 것이다. 추기경이 '하나님을 섬기듯 가난한 이를 섬긴' 마더 데레사를 특히 존경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로 시국 선언문 발표




맨 왼쪽은 일본 상지 대학 유학 시절. 앉은 이가 추기경이다. 추기경은 마더 테레사와 같은 삶을 살고 싶어했다.(왼쪽)


추기경은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과 함께하지 못했지만, 더 큰 아픔과 함께했다. 그의 어깨 위에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얹혀 있었던 것이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교회는 어두운 현실과 맞서는 교회였다. 1968년 1월,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주교였던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서 처음으로 노동자 인권을 옹호하는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사회 속으로 한 걸음 내딛은, 일대 방향 전환이었다.


1969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추기경이 된 이후, 한국 가톨릭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정면에서 응시하기 시작했다. 추기경은 "1970∼1980년대, 우리나라가 군사 정권 아래에 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1970년부터 추기경은 성탄절 메시지나 시국 담화문을 통해 군사 독재 체제를 비판했다. 1974년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이래, 1980년 광주의 비극을 거쳐, 1980년대 후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에 이르기까지 추기경은 천주교회와 양심 세력의 대변자이자 시대의 예언자 역할을 자임했다.




알현 :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즉위식에 참석했다(오른쪽). 맨 오른쪽은 1975년 서울 목동 재개발 지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교회 안팎에서 비판이 없지 않았다. 교회 내부에서 친정부 성향을 가진 신도들이 한국 교회가 정치 세력화한다며 로마 교황청에 투서하기도 했고, 광주 민주화운동 직후에는 재야에서 추기경의 대응이 너무 미온적이라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추기경은 한 글에서 1980년 5월 당시를 이렇게 돌이킨 바 있다.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교황청 대사·주한 미국대사·위컴 주한미군사령관 등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만났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초조한 나머지 교황청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추기경은 담배를 피웠다. 사회 원로들을 설득해 군부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내자고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추기경은 혼자서라도 강경한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려고 작정했었다. 추기경은 〈'지나간 것'에 하고픈 이야기〉에서 "자칫 성난 젊은 학생, 노동자 들을 충동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그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유혈 사태까지도 유발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어 몇 번 기안하다가도 버렸다"라고 썼다.




그렇다고 추기경이 교회 밖, 사회 현실에만 주목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 교회의 내적 성숙은 물론 세계 속에서 한국 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사업에도 주력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선교사를 파견하기 시작했고,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참석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열었고,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했다.


기자들이 왜 요즘은 시국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느냐고 묻자 추기경은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은퇴했는데도 하루도 쉴 날이 없다. 그리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말하는데 나까지 나설 필요가 뭐 있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연쇄 테러 참사에 대해서는 커다란 우려를 표시했다. 추기경은 "미국이 상당히 강하게 대처할 텐데, 제발 이것이 전쟁과 같은 더 큰 불행으로 확대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모든 나라의 정치인·언론인, 특히 종교인들이 인류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추기경은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인간 존중'이라고 강조했다. 인간은 존엄하다는 조항이 없으면 헌법이 무의미하다는 추기경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은 다름 아닌 하늘에서 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인간 존중은 하느님에 대한 존중이다. 금경축과 함께 팔순을 맞은 추기경이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낮추는 까닭은, 아직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교회가 아직 덜 쇄신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죽음의 문화가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일 터이다. 파멸로 가는
미국을 위한 성찰-김소희



'파멸로 가는 길’이라니? 영화 <로드 투 퍼디션(Road to Perdition)>은 불온과 성찰을 동시에 암시하는 듯한 제목을 내걸었다. 이 같은 양면성은 정통 갱스터 장르의 특징이기도 하다.


갱스터는 대도시에 사는 소외된 남성들의 비뚤어진 분신이다. 야심만만하고 출세를 원하는 남성들이 보기에, 자본주의적 대도시는 쉽사리 기회를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질서와 부패가 도시의 영혼을 휘감고 있다. 그들은 선과 악 사이에 분열증을 겪는다. 개인과 환경 사이의 이 같은 갈등을 비현실적일 만큼 멋들어진 스타일과 비장미로 포장해 놓은 것이 바로 갱스터 장르다.


<로드 투 퍼디션>은 전형적인 갱스터 영화이다. 야심과 윤리, 가족주의와 공동체,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 마이클 설리번(톰 행크스)이 치렁치렁한 코트를 입고 비 내리는 시카고의 밤거리에서 멋지게 총질하는 장면이 완벽한 조명 테크닉과 음향의 후광 속에서 펼쳐진다. 나이 든 두목으로 나오는 폴 뉴먼도 남자들의 환상에 딱 들어맞는 멋진 배우다.


<로드 투 퍼디션>은 여기에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인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문제다. 아들만은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자기 삶의 비밀에 다가오지 말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소망과 달리, 운명은 아들 마이클 주니어를 아버지 옆으로 바짝 데려다 놓는다. 둘은 퍼디션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장으로 도피하는데, 그 이름이 ‘파멸’ ‘지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들 앞에서 은행털이와 살인을 계속 저질러야 하는 아버지의 운명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단어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과연 마이클 설리번에게 구원이 있을까? 갱스터 장르 영화에 이런 질문을 덧붙인 것이야말로 샘 멘데스 감독다운 일이다. 그는 <아메리칸 뷰티>라는 성공적인 데뷔작을 통해 이미 가족 문제를 미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은유의 도구로 사용한 바 있다.


그런데 2002년의 할리우드는 왜 하필 1930년대의 갱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을까? 이런 의문은 자연스럽게 9·11 테러의 충격을 떠올리게 한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미국 안에서 나왔음직한 질문,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이런 보복을 당할 만큼 바깥 세계에 대하여 그렇게 나쁜 짓을 했단 말인가?”라는 목소리에 대한 영화적 메아리처럼 보인다. 자신의 가족과 조국에게는 성실했을지 몰라도 바깥에서는 피묻은 손을 오래도록 감추고 있다가 결국 자식에게 들켜버린 듯한 느낌 말이다.


샘 멘데스 감독은 이런 아버지-미국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은 회피하고 있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사람 각자가 채워 넣어야 할 답변일 것이다.






가족과 조직의
가혹한 진실-김봉석



샘멘데스 감독은 ‘가족’이라는 환상을 믿지 않는다. 아카데미 5개 부문을 휩쓴 <아메리칸 뷰티>에서는 온화하고 평화로운 중산층 가정이 어느 순간 산산이 흩어져버리는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두 번째 작품 <로드 투 퍼디션>은 갱스터의 배신과 복수를 그리고 있지만, 핵심적인 주제는 역시 가족이다. 진짜 가족과 유사 가족으로서의 갱스터 조직. 이미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가 보여주었듯, 동시에 두 가족을 행복하게 꾸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정과 조직의 이익은 서로 부딪친다. 각자를 움직이는 법칙과 원리도 다르다. 하나를 희생하지 않고는 어느 하나를 살릴 수 없다.


샘 멘데스 감독은 <로드 투 퍼디션>에서 미국 중산층의 이상형으로 자리잡은 배우 톰 행크스를 처절한 고통과 선택의 기로에 밀어넣는다. 보통 남자인 설리번은 가장 가혹한 상황에 몰린다. 자신의 가족을 잃고, ‘유사 아버지’ 존 루니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아일랜드로 가서 결코 돌아오지 말라는 존 루니의 ‘호의’를 물리치고, 그는 복수를 택한다.


<로드 투 퍼디션>은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영화다. 모든 일의 발단은 설리번의 아들 마이클이 코너가 사람을 죽이는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리번은 마이클을 탓하지 않는다. 설리번이 원하는 단 하나는 아들이 자신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뿐이다. ‘우리들은 천국에 갈 수 없지만’ 아들 마이클만은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들은 아버지를 닮기를 원한다. 존 루니의 아들 코너가 사기꾼에 비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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