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가주의 감독 전성시대…'시네마 한국' 꽃 핀다
  • 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1.10.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가주의 감독 4인의 영화 개봉/
탁월한 미학·주제 의식 돋보여
올가을 한국 영화의 꽃은 만개할 것인가? 〈친구〉 〈신라의 달밤〉 〈엽기적인 그녀〉에 이어 〈조폭 마누라〉까지 경이적인 흥행 성적을 올리고 있다. 제작비가 70억원이 넘는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가 대기하고 있어 전반기 39%였던 점유율은 후반기에 40%를 넘어 50%까지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올 가을이 기대되는 것은 이런 대형 영화 때문이 아니다. 〈봄날은 간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나비〉 〈꽃잎〉 등 그동안 한국 영화가 이룬 성취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성 있는 영화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감독 4인이 말하는 '내 영화 관람 포인트' 100∼101쪽 딸린 기사 참조).




〈봄날은 간다〉를 연출한 허진호 감독(38)은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로 데뷔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도 특별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듯, 수많은 영화 중에도 독특한 느낌을 주는 허감독의 영화는 관객에게 우리 영화를 보는 맛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허감독은 흔히 홍상수 감독과 비교되는데, 두 감독 모두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런데 홍감독이 관객의 폐부를 찌르듯 '우리 사는 게 이렇지 않아?'라고 거칠게 냉소한다면, 허감독은 관객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고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감정 절제를 통해 오히려 관객의 깊숙한 감정을 끌어내는 그의 영화들은 '허진호 미학'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더하기'에 익숙했던 영화계에 허감독은 '덜어내기'의 미덕을 일깨운 셈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범람하는 '영웅 신화'에 식상한 관객이라면 임순례 감독(39)의 영화를 꼭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일상과 철저하게 동떨어진 할리우드 상업 영화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동을 임감독의 영화에서는 얻을 수 있다.


장편 데뷔작인 〈세 친구〉에서부터 〈와이키키 브라더스〉까지, 임감독의 영화에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담겨 있다. 골목을 들어서면 바로 마주칠 것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해서 우리네 사는 얘기를 풀어내는 것이 바로 그의 영화이다.


임감독의 트레이드 마크는 뚝심이다. 그녀는 스크린쿼터 축소에 반대해 삭발했던 유일한 여성 영화인이었다. 두 번이나 삭발하며 한국 영화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몸으로 보여 주었던 그녀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통해 그 정당성을 영화로 증명했다. 영화라는 문화적 기호를 가지고 있는 것이 한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는 데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준 것이다.


임감독의 뚝심은 다른 곳에서도 읽을 수 있다. 8월부터 시작한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2만명 릴레이 시사회 행렬이 10월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녀의 전작인 〈세 친구〉의 서울 관객이 4만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런 '공짜 행렬'은 무모해 보인다. 자신의 영화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작가주의 감독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문승욱·송일곤은 한국 예술 영화의 미래


문승욱 감독(34)의 〈나비〉와 송일곤 감독(31)의 〈꽃섬〉은 스토리보다는 이미지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보기 편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의 이미지를 따라 가면서 퍼즐을 풀 듯 능동적으로 해석해 요모조모 뜯어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문감독과 송감독은 모두 폴란드 우쯔 국립영화학교 출신이다. 그들은 영화를 문화산업으로 보는 할리우드와 달리 예술로 보는 동유럽권의 전통을 익혔다.


두 감독의 영화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는 관점에서 출발해서, 세상의 법칙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단절을 보여주는 것을 영화의 중심 축으로 삼는다. 로드무비 형식으로 만들고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해 장자의 〈호접몽〉처럼 사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도록 연출한 것도 닮았다.


두 감독에게서 우리는 한국 영화의 미래를 볼 수 있다. 무거운 주제를 디지털 카메라로 경쾌하게 담아 내는 이들의 작업 방식은 요즈음 영상 세대의 호흡과 잘 맞아떨어진다. 첨단 기술을 이용해 영화를 만들면서도 그 안에 인간 중심적인 내용을 녹여내는 이들의 주제 의식은 미래 영화의 방향을 가늠하게 해준다.


하지만 내면과 정신 세계를 중시하는 동유럽권 영화의 영향을 받은 두 감독의 작품은 철학적이어서 재미가 덜하다. 감독 자신에게 천착하고 있어서 이해하기 힘든 측면도 없지 않다. 그래도 영화를 통해 문화의 지평을 넓히려는 관객이라면 꼭 볼 만한 영화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