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명성 황후 미스터리를 벗긴다
  • 김은남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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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여걸의 복권 요구한다/발군의 외교력 지닌 '고종의 방패'
옛노인들이 며느리를 흉볼 때 가끔 쓰던 욕이 '민후(閔后) 같은 년'이었다. 민후란 민비(閔妃), 곧 명성 황후를 일컫는다.


지난 100년간 명성 황후(1851∼1895)는 우리에게 이런 존재였다. 권모술수로 시아버지를 내치고,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으며, 급기야는 나라까지 말아먹은 '사악한 암탉'. 비록 역사책은 그녀를 '외세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국모'라고 기록했으나 일반 한국인에게 그녀는 잊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였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구국의 순교자'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최근 몇 년간 '명성 황후 신드롬'을 일으킨 뮤지컬(〈명성 황후〉)·드라마(〈명성 황후〉)·다큐멘터리(〈다시 살아오는 국모, 명성 황후〉)는 일제히 그녀를 '당대 최고 정치가''애국 혼(魂)의 화신'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 덕분일까. 일반 대중은 그녀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폐가나 다름없던 명성 황후 생가(경기도 여주)는 새 관광 명소로 탈바꿈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그녀만큼 단기간에 폭발적인 관심을 끈 인물은 일찍이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황후의 진면목일까. 명성 황후 시해 106주기(10월8일)를 맞은 이즈음, 황후를 객관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도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94쪽 딸린 기사 참조). 여기에 의거해 황후에 얽힌 진실을 추적해 보자.


고종과 대원군 사이에서 대리전 수행


명성 황후의 삶에서 가장 먼저 재평가되고 있는 부분이, 시아버지인 대원군과의 관계이다. 고종보다 한 살 위인 그녀를 왕비로 간택한 사람이 대원군이었다. 당시 어린 고종을 대신해 강력한 섭정 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대원군은 자기 어머니와 아내의 가문이기도 한 여흥 민씨 집안에서 며느리를 들임으로써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부모를 공경하고 〈춘추좌씨전〉을 즐겨 읽던 이 총명하고 지혜로운 며느리는 시집온 지 10년 만에 시아버지를 권좌에서 내모는 중추 역할을 하게 된다. 기존 역사가들은 황후의 권력욕이 이같은 사태를 불렀다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이배용 교수(이화여대·사학)는 지난 10월8일 여주대학이 주최한 '명성 황후 재조명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명성 황후는 그 자신이 권력욕의 화신이라기보다 대원군과 고종 사이에서 대리전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1873년 12월 대원군이 밀려난 데에는 사실상 고종의 결심이 작용했다. 대원군은 겉으로는 서원철폐령을 비롯한 잇단 실정(失政)으로 유림의 거센 반발을 사 실각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갈등은 그로부터 2년 전 고종이 대원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민승호 등 민 왕후의 친척들을 정부 요직에 등용하면서부터 이미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교수의 설명이다.


당시 고종의 나이 22세. 성인이 된 왕은 스스로의 정치 노선에 따라 친정(親政)을 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질 법했다. 당시 고종은 쇄국 정책으로 일관한 아버지의 경직된 국정 운영에 이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유교적 효의 윤리에서 아버지와 직접 충돌하기에는 도덕적 부담이 너무 컸다. 이러한 남편의 욕구를 대신해 대원군과 정면 충돌한 것이 바로 왕후였다. 대원군 처지에서도 임금에게 직접 맞서기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천륜에도, 유교적 충(忠)의 윤리에도 맞지 않았다. 이에 대원군 또한 화살을 왕후에게 돌려 우회적으로 고종의 독자 노선을 견제하려 했다는 것이 이교수의 분석이다.




'고종의 정치적 방파제'라는 민 왕후의 역할은, 그녀를 둘러싼 하나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실마리를 던져 준다. 그 수수께끼란 '왜 왕후는 각종 변혁 운동이 있을 때마다 왕을 제치고 직접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를 죽이려 든 것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임오군란(1882)을 일으킨 보수파 군인과 유생에게나, 갑신정변(1884)을 일으킨 급진 개화당에게나 그녀는 핵심적인 공격 대상이었다.


이들이 공격하고자 했던 왕후의 개화 정책은 곧 고종의 개화 정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유교적 충의 관점에서 고종에게 직접 대항하기보다는 왕후를 공격하는 우회로를 택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보수파나 급진 개혁파가 왕후를 공격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근대화를 추진한다는 명목 아래 새 기구를 창설하면서 주요 요직을 민씨 일족이 독차지했다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실제로 1880년대 중앙과 지방 관직에 진출한 민씨 친족은 2백6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배용 교수는 민씨 친족 세력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왕후가 능력보다는 충성도에 따라 친족을 가려 쓴 것은 사실이었다. 요직에 오른 일부 민씨가 전횡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대원군을 정점으로 한 정적들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고종과 왕후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려면 믿을 만한 왕당파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에 따라 발탁된 민씨 일파는, 왕을 압도하면서 세도 정치를 일삼은 기존 친족 세력과 달리 왕권을 보좌하는 정치적 지지 기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 이배용 교수의 지적이다.


이민원 박사(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에 따르면, 왕후는 여러 차례 변란을 겪으면서 고종의 정치적 파트너이자 '일급 참모'라는 위치를 다져 갔다. 왕후에 대한 고종의 의존도는 날로 높아졌다. 특히 대외 관계에서 왕후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외국인의 방문기에 왕후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다.


1883년 서양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민 왕후를 알현한 주한 미국공사 부인 로즈 푸트는, 그녀를 '뛰어난 침착성(masterful poise)'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 내려는 듯한 눈빛(searching eyes)'을 지닌 총명한 여인이라고 묘사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민 왕후를 만난 영국의 여행가 비숍 여사는 이렇게 썼다. '당시 왕후는 40세가 넘는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왕후를 자주 만났던 언더우드 부인의 기록은 좀더 분석적이다. '그 분은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가장 신랄한 그 분의 반대자들도 항상 그 분의 기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실제로 외교관으로서의 왕후는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왕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을 감탄시키곤 했다고 한다(미국 공사관 통역관 윤치호의 일기).


민 왕후의 외교 감각은 기민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의 간섭이 노골화하자 러시아에 접근해 청을 견제하려고 시도한 것이 왕후였다. 그후 조선·일본 간에 곡물 수출을 둘러싸고 이른바 방곡령 사건(1892∼1893)이 터지자 장차 조선 반도에서 청나라보다 일본의 위협이 더 거세질 것을 재빠르게 간파한 것도 왕후였다. 당시 러시아 외상은 청일전쟁이 임박할 때까지도 일본의 위협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널뛰기 외교로 국가 위기 초래" 비판론도


그러나 민 왕후가 주도한 대외 정책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그녀가 조선의 독립을 일관되게 추구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제아무리 날고 기는 민 왕후라도 당시의 요동하는 국제적 역학 관계를 꿰뚫기에는 시대적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비판론자들은 민 왕후가 청일전쟁을 전후해 친일→반청→반일로 부나비처럼 '널뛰기 외교'를 하는 바람에 나라의 운명을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명성 황후는 어떻게 살았을까




























































1851년 9월25일
(양력 11월17일)
본관 여흥에서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외동딸로 출생
1863년 12월13일 고종 즉위(조선 26대)
1866년 3월6일 왕비로 책봉(당시 15세)
1874년 2월8일 순종(척) 출산
1874년 11월5일 국왕 친정 선포(대원군 실각)
1882년 6월5일 임오군란
1882년 6월10일 명성황후, 장호원으로 피난
1882년 8월1일 명성황후 환궁
1884년 10월17일 갑신정변
1894년 1월10일 동학농민전쟁
1894년 6월23일 청일전쟁
1894년 6월25일 갑오경장
1895년 10월8일(양력) 명성 황후 시해(을미사변)
1897년 10월12일(양력) 왕비 민씨에게 명성 황후 시호 하사
1897년 11월22일(양력) 명성 황후 국장 거행, 양주(홍릉)로 모심


3국 간섭의 틈을 타 왕후가 시도한 외교술은 왕후 자신의 명조차 재촉하고 말았다. 3국 간섭이란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가 일본에 할양하기로 했던 랴오둥 반도를 되돌려주도록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이 공동 권고한 사건을 말한다(1895년 4월). 이로써 청일전쟁의 승리에 들떠 있던 일본의 기세는 주춤해졌다.


그러자 왕후는 청나라가 한반도에서 누리던 특권을 러시아에 몰아줌으로써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이른바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구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왕후는 친미(親美)도 추구함으로써 '거일'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왕후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친절을 러시아 정부의 호의로 착각하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 최문형 교수(한양대 명예교수)의 지적이다. 이창훈 한라대 총장(국제정치)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 정부는 조선 문제에 적극 개입할 의사가 없었다. 시베리아 철도 완공에 명운을 걸고 있던 러시아는 만주를 침해당하지 않는 한 일본과 충돌할 의사가 없었다.


결국 민 왕후는 제국 열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일본의 직접적인 표적으로 떠올랐다. 서울에 거류하는 일본인 사이에는 이미 1895년 초부터 '여우'(민 왕후)를 사냥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이는 민 왕후가 그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민 왕후 시해 사건 현장에 있었던 〈한성신보〉 기자 고바야카와는 훗날 이렇게 기록했다. '(당시 일본으로서는) 대표적 인물인 민후를 제거하여 조선과 러시아가 결탁할 여지를 없애는 것밖에는 방책이 없었다. (중략)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일개 민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민후조락사건〉)


민 왕후의 죽음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일본 정부가 왕후 시해 사건에 개입했는지 여부 또한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본은 사건 이후 끊임없이 말을 바꾸면서도 이것이 조선 내부의 '야만적이고 중세적인' 권력 다툼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기본 시각만은 바꾸지 않았고, 이를 안팎에 유포해 왔다.


그러나 최문형 교수는 이 사건을 통해 일본이 러시아에 '소리 없는 선전포고'를 했다는 독자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위 상자 기사 참조). '때를 잘못 만난 비운의 여성.' 민족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나, 여성사적으로나 지금 역사는 그녀가 복권되기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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