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은 · 변희재 대담/"자위 행위를 억압하지 말라"
  • 진행·정리 김은남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11.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유주의자 김성은 · 변희재 '대담한 대담'
자위는 사실상 최후의 금기 영역이다. 성(性)에 대해 당당하게 얘기하는 사람도 자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만다. 이런 현실에서 자위야말로 최상의 섹스라고 주장하는 베티 도슨의 책이 소개되어 파란을 예고하고 있다(위 상자 기사 참조). 그녀에 따르면, 자위는 자기 몸을 알고 사랑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자위를 통해 스스로의 성적 통제권을 회복함으로써 개인은 온갖 정치적·종교적·이데올로기적 목적으로 성을 억압하려 드는 권력과 맞설 수 있다.


과연 그럴까? 한국 사회에서도 최근 성을 둘러싼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징후가 농후하다. 동성애·트랜스젠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가운데 '정상적인 성'과 '비정상적인 성'의 구분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여성의 성기를 다룬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폭발적인 호응에 힙입어 재공연에 들어갔고,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 성 상담소'는 청소년을 상대로 '나의 에로틱 존(성감대)을 알자'는 파격적인 성교육을 펼치기도 했다. 바야흐로 '자위 해방'은 실현될 것인가. 주목되는 여성 성(性) 칼럼니스트 김성은씨(31)와, 문화 평론가 김지룡씨가 추천한 신세대 자유주의자 변희재씨(27) 두 남녀가 만나 '대담한 대담'을 벌여 보았다.





김성은(위 왼쪽)씨는 잡지사 기자와 여성 포털 사이트의 컨텐츠 PD를 거쳐, 지금은 〈일간스포츠〉〈GQ〉〈앙앙〉등에 연애·성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위쯔'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변희재(위 오른쪽)씨는 서울대 미학과 재학 때부터 왕성한 입담과 필담을 과시하며 〈스타비평〉〈아이 러브 인터넷〉 등의 단행본을 펴냈다. 지금은 시사 웹진 〈대자보〉 편집장으로 있다.


김성은 : 고백하건대, 이 자리 나오기가 정말 두려웠다.


변희재 : 왜, 사생활이 전부 노출될까 봐?


김 : 그건 아니다. 옐로 피플로 찍히는 건 별로 두렵지 않다. 단지 상대방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망설였다. 이런 얘기, 사실 한국 사회에서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변 : 동감이다. 그렇지만 성(性)을 공적인 자리에서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성은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주제이다.(웃음)


김 : 자위는 사실 섹스보다도 내놓고 얘기하기가 어렵다. 전에 일하던 여성 포털 사이트에서 미니 여론조사를 해 보니까, 자위를 해 보았다는 여성이 30% 남짓이었다. 그런데 성 의학자들은 자위하는 여성 비율을 70% 안팎으로 잡는다. 도대체 이 많은 여자들이 내숭을 떠는 걸까? 아니면 수치가 부풀려진 걸까?


변 : 나도 그게 정말 의문이다. 여자들이 성적으로는 훨씬 빨리 성숙하는 것으로 아는데, 여자들은 자위하고픈 욕망이 없는 건가?


김 :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뭣 모르고 남들 앞에서 자위하는 여자애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른한테 들키면 크게 혼날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행동을 억누르게 되는 거지. 그건 남자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변 : 천만에, 그렇지 않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자위 행위를 비난받아 본 기억이 없다. '그것 생각 때문에 공부가 안된다'고 누군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선생님은 '뭘 고민하냐. 빨리 해 버리고 공부하면 되지'라고 조언하곤 했다.


김 : 도덕적인 죄책감은 없나?


변 : 웬 죄책감? 그런 건 사이코들이나 하는 거라고 남자애들은 생각한다. 물론 고민은 있지. 이러다 머리가 나빠지면 어쩌나, 성기가 작아지면 어쩌나, 뭐 그런 고민들.


김 : 여자들이 자위를 잘 안하는 데는 사회적 요인뿐 아니라 물리적 요인도 있는 것 같다. 그곳이 항상 축축하다 보니 일단 손을 대기가 찝찝한 데다 성기의 구조 자체도 들여다보기가 어렵게 되어 있지 않나?


변 : 남자들은 항상 자기 것을 보게 되니까 오히려 무감각한데. 여자들은 정말 자기 성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건가?


김 : 내가 성 상담 코너를 진행하면서 보니까 30대 기혼 여성조차도 자기 성기를 제대로 본 사람이 드물었다. 사실 힘들긴 하지.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보면 진희경이 거울로 자기 성기를 들여다보려 낑낑대다가 욕실 바닥에 넘어져 결국 골절상을 당하지 않나? (웃음) 그렇지만 역시 여자들이 자기 몸에 대해 너무 무지한 것은, 상당 부분 여성의 성을 억압해 온 사회 탓이라고 본다.


변 : 자위에 대한 억압은 남자들에게도 있다. 아까 자위 행위를 비난받아 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춘기 때 얘기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남자들도 더 이상 자위 얘기를 하지 않는다. 모두 섹스 얘기뿐이다. 그렇지만 기혼자가 아닌 이상 어디 섹스할 수 있는 환경이 그렇게 자주 조성되는 건가? 속으로는 모두 자위로 욕망을 해소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한다.


김 : 여자들한테는 사춘기 때나 어른이 된 뒤에나 자위라는 용어 자체가 금기이다. 물론 요즘은 좀 달라지는 분위기이다. 남자 친구와 헤어진 뒤 '이제는 어떻게 성적 욕망을 해결하나' 고민하는데, 여자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툭 던졌다. '자위하면 되잖아.' 그 순간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아, 그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었구나.'


변 : 그게 몇 살 때 일인가?


김 : 대학 졸업하고 2∼3년 뒤?


변 : 윽, 여자들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남자들은 이미 초등학교 4∼5학년이면 끼리끼리 모여 포르노를 보면서 자위 행위를 익힌다. 그때 포르노 모임을 주도했던 녀석이 신문 기자가 됐는데, 이제는 근엄하게 '신촌의 성적 타락을 고발한다' 어쩌고 하는 기사만 계속 써대더라. (웃음)


김 : 우리 사회의 이중 잣대는 정말 웃긴다. 상담하다 보면, 배웠다는 사람일수록 성으로부터 훨씬 덜 자유롭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기 안의 커튼'을 겹겹이 두르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혹시 섹스 상대가 자위하는 것을 본 일은 있나?


변 : 본 적도 없었고, 별로 보고 싶지도 않았다. 포르노나 에로 영화에서 너무 많이 봤으니까.


김 : 그렇지만 포르노 여배우와 사랑하는 사람은 다르지 않나? 각자 자위하는 모습을 보면 상대방의 성감대가 정확하게 어딘지, 어떤 부위를 어떻게 자극해야 상대방이 좋아하는지 더 잘 알 수 있을 텐데.


변 : 연애를 오래 해 커뮤니케이션이 잘되는 사이라면 몰라도, 나처럼 연애 기간이 짧은 사람은 그게 쉽지 않다.(웃음) 아니, 어쩌면 기혼자일지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자들은 흔히 남자가 삽입 섹스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그렇지 않다. 나도 피곤할 때는 서로 부드럽게 만져주고 애무하는 그런 관계가 훨씬 좋다.


김 : 그럼 그렇게 요구하면 되지 않나?


변 : 그게 쉽지 않다. 남자들은 항상 여자를 만족시켜 줘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자가 모든 것을 다 해 주기 바라면서 목석처럼 누워 있는 여자를 보면 나도 미치겠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은 섹스 혐오증에 걸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남자가 뭔가 힘으로, 크기로 여자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떨치기란 정말 쉽지 않다.


김 : 남성의 크기와 여성의 만족도 사이에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 아닌가?


변 : 그래도 남자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당장 섹스용품점에 가 보라. 여성용 자위 기구 거개가 길이 30cm 이상의 초대형 제품 아닌가.(웃음)


김 : 듣고 보니 남자들이 불쌍해진다. 베티 도슨의 말마따나, 남자들도 자기가 느끼는 오르가슴의 질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여자들이 실제로는 만족하지 못하면서 상대를 배려해 오르가슴을 느끼는 시늉만 하듯.


변 : 자위 그 자체가 완전한 섹스일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면, 서로 상대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강박감 없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자위)가 곧 최상의 섹스에 이르는 길임을 인정한다면 남녀 간의 시행착오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김 : 그렇지만 나는 자위가 최상의 섹스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자기 몸을 직접 만지는 것보다 지하철에서 만난 근사한 남자를 떠올리며 성적 공상을 즐기는 데서 더 짜릿함을 느끼는 여자들이 많다. 삽입 섹스에서 극치감을 느끼는 여자들도 있다. '이것만이 바른 섹스이다'라고 강요하기보다 '네가 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최상의 섹스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변 : 그러려면 먼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의 성교육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현행 성교육은 성을 즐겁게 받아들이기에 앞서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 여자를 '잠재적 피해자'로 여기게끔 만든다. 그렇지만 스스로 성을 즐기고 책임질 줄 아는 사회에서는 성폭력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성에 대한 무지가 다시 자율적·타율적 억압을 부르는 비극이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성과 가정에 대한 발칙한 도발-김소희
발칙한 영화가 나왔다. 불륜 이야기는 근자에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하나의 트렌드가 되다시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에 나오는 남자는 발칙하고, 더욱이 여자의 발칙함은 용서가 안 될 정도이다. 우선 여자의 발칙함에 관한 리스트부터.하나. 이 여자는 남편이 바람을 좀 피웠기로서니 그걸 빙자해서 마누라 역할을 완전히 방기한다.
남편이 뉘우치고 사정하면서 아프다는 마누라를 위해 하던 일도 팽개치고 시골로 이사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둘. 세상에 저 혼자 청결한 척, 조만간 인생을 결딴낼 듯이 연약한 척하던 이 여자, 이웃집 바람둥이가 던진 게임의 낚싯바늘을 덥썩 문다.
대번에 모텔로 찾아든 두 남녀. 이하 생략.셋. 넋이 나간 이 여자, 남편이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와중에 잠옷 바람으로 창문을 넘어 애인의 집으로 달려간다. 위험한 짓은 하기 싫다는 남자로부터 퇴짜를 맞고 와서는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 한다. 아내가 자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하며 감동받는 남편. 아, 남자를 완전 바보로 만드는군.넷. 온 동네가 다 알도록 요란을 떨더니 남편한테 들키자 또 거짓말하는 여자. 그러나 이번엔 안 통한다. 이젠 완전히 뻔뻔해지네. 매 맞고 애인 찾아간 것까지는 예상 가능한데, 뒤늦게 딸 생각은 왜 하나.다섯. 인생에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있었던 양 심오한 척하는 끝맺음이라니.대한민국의 수많은 남자들이 이보다 더 뻔뻔하게 바람을 피우겠지만, 그들 중에 이 여자를 용서할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또 남편의 바람에 화병이 나서 미칠 것만 같은 마누라들도 상당수가 이 여자를 향해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여자 미흔의 발칙함이 마음에 든다. 남자도 마음에 든다.
사랑과 결혼의 신성함에 상처받고, 그 누추함에 뼛속 깊이 절망하고, 그 결과 진지한 척하지 않게 된 남자. 이 남자 인규의 권태로움이 마음에 든다.  <밀애>는
성애의 생명력과 가정의 신성함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위선적인 엄숙주의, 편의적인 윤리관이 산산조각 난다. 그러나 영화는 이 문제를 극단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멈칫거린다.       

지독한 불륜의낭만적 파국-김봉석
먼저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밀애>는 도전적이다. 여성의 욕망에 대해 <밀애>는 당당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미흔은 남편이 아닌 남자와의 섹스를 통해서 다시 세상을 만난다. 세상 사람들이 쉽게 ‘불륜’이라 부르는 관계를 통해서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희로애락을 다시 느끼게 된다. <밀애>는 편견과 금기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긍정적인 시선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밀애>는 너무나 성기다. 인물과 사건의 윤곽만 툭툭 만들어놓고는 세밀하게 내부를 채우지 못한다.
미흔의 깨달음은 성급해서 공감을 사지 못한다. 미흔이 인규와의 ‘불륜’에서 찾아낸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랑이 시작되면 세상의 모든 시름과 번뇌가 풀린다고? <밀애>의 치명적인 약점은 미흔과 인규의 게임, 아니 사랑이 단지 운명적인 사랑일 뿐이라는 것이다. 지독한 상처 때문에 가벼움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남녀가, 외면할 수 없는 치명적인 사랑에 ‘빨려드는’ 과정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인규의 캐릭터 때문이다. 가족을 두고 시골 마을에 혼자 내려온 의사 인규는 지프를 과속으로 몰고 다니며, 한가할 때는 반바지 차림으로 안락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신다. 그런 남자가 미흔에게 게임을 건 것은 무슨 이유일까? 미흔의 깊은 상처에 공명했다는 설정은, 적어도 스크린에 담긴 인규의 캐릭터에서 읽어낼 수 없다. 미흔과 인규는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다. 물론 몇 가지 단서를 던져주고는 있다. 미흔은 남편의 여자로부터 ‘네 남편이 나에게 빨려들어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인규에게 들었던 말도 ‘빨려들어가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미흔이 인규를 만나기 직전에 들어갔던 폐가도 불륜과 연관이 있다. 그 집에서 불륜을 저지르던 며느리는 그 광경을 목격한 시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였다. 몇 가지 불륜과 폭력이 겹치지만 <밀애>는 그 의미를 엮어내는 데는 실패한다. 여성의 욕망이 원하는, 기존의 억압적인 제도를 파괴하거나 제도를 뛰어넘는 여성의 욕망과 사랑을 보여주지 못한다. <밀애>가 게임 과정에서 그 욕망의 정체를 세밀하고 진지하게 파고들었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밀애>는 그저 운명적인 사랑을 찾아 헤매는 남녀의 낭만적인 파국을 그린 보통의 멜로 영화로 만족한다.   &nb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