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에 이런 일도 있었네
  • 부산·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1.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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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세 빼 시네마 천국 왔죠"/
신명 넘친 '필름 해방구' 부산국제영화제 르포
부산국제영화제를 생선에 비유하자면 갓 잡아 올린 물 좋고 싱싱한 횟감이다. 자갈치 시장의 물 좋은 생선처럼 퍼덕퍼덕 살아 움직이는 싱싱한 영화들이 세계 영화인들의 입맛을 자극한다. 6년 만에 키가 부쩍 큰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제 아시아의 영화를 세계에 소개한다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고 세계의 내로라 하는 예술 영화들이 모여드는 진정한 국제 영화제로 발돋움했다. 11월 9∼17일 펼쳐진 이 '각본 없는 드라마'의 장면 장면을 살펴보았다.




장면 하나 : 대영시네마 앞 도로

"영화 잘 보셨으면 조금만 보태주세요." 자신을 자라왕(19)·빨간개구리(19)라고 소개하는 신세대 거지 2명이 구걸에 열심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구름처럼 몰려든 관객들을 보고 이들은 우유팩으로 즉석에서 구걸통을 만들고 동냥질을 시작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영화제만 같아라"고 말하는 택시 운전사 박진웅씨(60) 말마따나 영화제는 이제 부산 시민 모두의 잔치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보인다.


장면 둘 : 대영시네마 현관

"오늘 저녁 8시30분, 대영시네마 1관 〈낙타들〉 표 필요하신 분 계십니까?" 자원봉사자 강근철씨(20)가 반환된 표를 사갈 사람을 불러모으기 위해 목청껏 외치고 있다. 확성기마저 고장 나서 목이 완전히 잠겼지만 그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는다. 6년째 자원 봉사를 하는 김삼생씨(67)를 비롯해 3백50명에 이르는 자원봉사자는 영화제의 보이지 않는 힘이다. 야외 행사 담당인 홍철영씨(29)는 매일 밤 늦게까지 남아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해준 자원봉사자가 없었다면 진작 쓰러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면 셋 : 대영시네마 옆 카페

6년째 영화제에 개근하는 시네마키드 박상수씨(21)가 잠시 쉬고 있다. 이번에도 영화 25편을 예매하고 내려온 그는 밤이면 숙박비를 아끼느라 찜질방과 PC방을 전전하며 영화 사냥에 나서고 있다. 방세를 빼서 영화제에 온 상명대 영화학과 전성희씨(21)도 박씨 못지 않은 시네마키드다. 송일곤 감독을 너무 좋아해 '엉아'라고 부르는 전씨는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부산에 머무르겠다고 투지를 불태웠다.


장면 넷 : 다시 대영시네마 현관

이번에 〈수취인 불명〉과 〈나쁜 남자〉를 영화제에 출품한 김기덕 감독이 팬들의 사인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그가 사람들을 피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사인을 받겠다는 사람이 한 사람씩 다가온다. 부산에서 그의 사인을 받아간 사람은 대략 천 명. 그의 영화를 개봉관에서 본 관객 수와 맞먹는 셈이다. 흥행에 참패한 김감독의 영화 표가 거의 매진되는 부산국제영화제는 그가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어 가는 곳이다.


장면 다섯 : 대영시네마 3관

"이런 영화를 만들어 주어서 고맙다." "다시 개봉하면 반드시 주변에 추천하겠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상영이 끝나고 감독과 배우가 관객에게 인사하려고 무대에 오르자 찬사가 쏟아졌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패자부활전을 이끌고 있는 마술피리 오기민 대표는 "여러분 덕분에 힘을 얻었다. 얼마나 관객이 많이 드느냐와 상관없이 반드시 부산에서 재개봉하겠다"라며 화답했다.


개봉을 앞두고 작품성 있는 영화들이 줄줄이 흥행에 참패해 의기소침했던 〈꽃섬〉 감독과 배우들도 카페를 빌려 관객과 만나는 등 전방위 홍보에 나섰다. PIFF 광장에서 장미꽃 한 송이와 영화 홍보 엽서를 나누어 준 뒤 엽서를 버린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배우 김혜나씨(21)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장면 여섯 : 부산극장 옆 카페

〈삼사라〉의 판 나린 감독(독일)이 관객들과 5시간 가까이 자기 영화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다. 원래 토론토 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 상영을 하려고 했던 그는 이번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하게 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거기는 지금 몇시니?〉의 차이밍량 감독(타이완)은 너무나 분석적인 관객들에게 시달린 나머지 제발 영화를 가볍게 보아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장면 일곱 : 씨네시티극장 3관

독립 장편 영화 발전에 대한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김혜준 정책실장이 다른 토론자와 갑론을박하며 열변을 토하고 있다. 영화제는 한국 영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 영화제에서 김실장은 세미나 세 곳과 각종 토론회에 참여했다.


장면 여덟 : PIFF 광장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삽시다." 배우 명계남씨가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관한 인쇄물을 돌리고 있다. 명씨의 뒤를 따라오며 한 남자가 "왜 명계남이 〈조선일보〉를 반대하는지가 이 책 안에 있습니다. 천원입니다"라고 말하며 책을 판다. 명씨는 책을 산 사람에게만 사인해 준다며 그와 보조를 맞춘다. 부산은 영화인들이 자신의 정치적인 목소리를 담아내는 곳이기도 하다.


장면 아홉 : 코모도호텔 2층 커피숍

미로비전 채희승 대표(27)가 영화 해외 배급을 위한 상담을 하고 있다. 루빙 젠 감독의 〈크라이 우먼〉을 맡고 있는 채대표는 반응이 좋아 연신 싱글벙글이다. 직원들이 전부 나서도 몰려드는 상담을 소화하지 못할 정도이다.


장면 열 : 코모도호텔 1층 충무홀

유럽 영화 세일즈에 나선 EFP(European Film Promotion) 클라우디아 랜드버거 대표가 함께 온 배우와 감독 들을 소개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의 중심이 되면서 발 빠른 세계 영화인들은 이곳에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있다. 자신의 영화사 'Applause Pictures' 주최로 파티를 연 〈첨밀밀〉의 천커신 감독 외에도 각종 리셉션과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모으는 해외 영화제 관계자들은 많았다.


장면 열하나 : 남포동 인근 재즈바

한국 영화인의 밤 파티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한국 영화인보다 외국 영화인이 더 많다. 이들은 백세주를 병째로 마시는 진풍경을 연출하면서 부산의 밤을 즐기고 있다. 이런 파티는 부산영화제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일본에서 온 게이코 이타가키 씨는 "이런 파티가 도쿄영화제에서 열렸다면 집안잔치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면 열둘 : 해운대 해변가 포장마차

〈수취인 불명〉에 출연한 반민정씨(23)와 〈나쁜 남자〉의 배우 서 원씨(23)가 소줏잔을 기울이고 있다. 관객들을 만나고 영화를 보느라 정신 없이 낮 시간을 보낸 이들은 밤에나마 여유와 낭만을 만끽하고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남포동 극장가와 달리 숙소가 몰려 있는 해운대는 나무랄 데 없는 휴양지이다. 부산은 영화제와 함께 추억을 만들어 가기에 안성맞춤인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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