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눈물 얼룩진 ‘거대한 자화상’
  • 이문제 (moon@sisapress.com)
  • 승인 2002.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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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씨, 대하소설 <한강> 출간해 민족사 1세기 ‘완전 정리’…
개발독재 시대 ‘인간 생태’ 조감
50대 아버지가 보릿고개 넘기던 시절의 고단함을 늘어놓자, 다 큰 아들이 빤히 쳐다보며 “라면도 없었나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40대 초반의 대학 교수가 광주 시민들은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진압군과 대항하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한 대학생이 손을 들고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삐삐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나요?”.





조정래씨의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역사교과서라고 말하거니와, 조씨가 최근에 펴낸 대하소설 <한강>(전 10권, 1월 하순 현재 8권까지 나와 있다) 역시 살아있는 현대사가 아닐 수 없다. 보릿고개와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식이나 감수성이 거의 없는 신세대에게 <한강>은 어머니·아버지 세대의 ‘육성’으로 들릴 것이다(<태백산맥>과 <아리랑>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의 비망록이다).



보릿고개와 광주의 비극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라면과 삐삐를 들이대는 ‘단군 이래 가장 부유한 세대’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중년들에게 <한강>은 오랜만에 펼쳐보는 ‘눈물 자국 흥건한 일기장’이다. 1959년 초겨울, 호남선 열차에서 내려 서울에 첫발을 내딛는 중학생 유일표는 ‘청운을 꿈’을 품고 서울로 향했던 전후 세대(4·19, 유신세대라고 해도 좋다)의 초상이다.





월북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일표와 그의 형 일민의 몸부림을 중심으로, 고등고시에 패스해 권력의 단맛을 알아가는 이규백·김선오, 빨치산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주먹 세계로 진출한 서동철, 독립 투사의 손자로 태어나 주류 사회에 진입하는 허 진 등이 4·19세대를 이루고, 전남 토호 출신 국회의원 강기수, 예비역 대령 출신 국회의원 한인곤, 건설회사 사장 박부길, 월남한 기업가 임상천, 임상천과 동업하는 장성 출신 정동진 등이 당시 기성세대의 한 축을 이룬다.



여기에 처자식을 고향에 남겨두고 부두 노동자로 살아가는 천두만, 석탄을 훔치다가 석탄 더미에 깔려 비명 횡사한 아버지의 아들 노복남, 그리고 월남한 기업가 임상천의 딸 임채옥, ‘강진·장흥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국회의원의 딸 강숙자, 건축업자의 딸 박영자, 사법고시에 패스한 김선오의 여동생 김광자와 김명숙, 야반도주한 해남댁 등이 번갈아 등장하면서 소설은 손으로 만져질 듯한 육체성을 획득한다.





작가가 밝혔듯이, 망원경적 총체성과 현미경적 구체성을 구사하면서 <한강>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 개발 독재의 열매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온 모든 사람들의 고통의 결과라는 것이다. 작가가 보기에, 1960년부터 1980년에 이르는 ‘격랑 시대’는 분단 상황과 경제 개발이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절대 모순으로 작동하던 시기였다.



작가는, 오늘의 경제적 성취가 높으면 높은 것일수록 그 아래에서는 수많은 ‘우리’들이 고통스러운 몸부림으로 서로 뒤엉키며 거대한 기둥들이 되어 떠받쳐 왔다고 보고 있다. 그 기둥들은 피와 눈물이 얼룩진 ‘거대한 인간의 탑’이다. 그리하여 <한강>은 ‘숨김없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 신랄하고도 감동적이며 거대한 자화상에 이르러 한국 현대사 3부작은 완성되었다. <아리랑>이 <태백산맥>의 전사(前史)였듯이 <한강>은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발원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랑>이 20세기 벽두 나라를 잃고 헤매던 민족의 수난사와 나라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던 역사를 복원했다면, <태백산맥>은 해방 공간에서 6·25 휴전기에 이르는 시기로 거슬러올라가 분단 이데올로기의 발생학을 되살려 놓았다. <한강>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식민지와 전쟁을 거치며 황폐해진 민족사의 헐벗은 아들 딸들이었다.



소설로 던진 질문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조정래씨의 한국 현대사 3부작에 대한 찬사는 일일이 소개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다. 문학 평론가 임헌영씨는 조정래씨가 완성한 한국 현대사 3부작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한 많은 <아리랑> 눈물 고개를 넘어, 피맺힌 <태백산맥>을 포복한 뒤 드디어 악다구니 같은 삶의 현장 <한강>에 이르렀다. 이 유장한 민족사 1세기가 도도히 흐르는 대서사시. 세계 어느 작가도 도전하지 못했던 웅휘한 역사 문학의 승리이다.”



<한강>의 본류는 분단 상황의 반인간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 월북한 빨치산의 아들인 유일민과 유일표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걸려 수시로 넘어진다. 분단 상황은 유일민으로 하여금 연애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서독에 광부로 나가려다 제지당했고, 급기야 주류 도매업에서도 손을 떼게 만든다. 일민의 동생 일표는 일찌감치 희망을 접고 재건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두 형제에게 아버지는 ‘사슬’이었다.



<한강>은 신분 상승의 생태학이기도 하다. 지난 40년간, 한국사회는 분단 이데올로기와 압축 발전의 와중에서 저마다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법고시와 직장, 그리고 돈이 신분 상승의 엘리베이터였다. 천두만과 같은 밑바닥 인생들에게 일자리는 신분 상승이기 이전에 생존의 문제였다. 서독에 파견된 간호원이나 광부, 월남전에 자원한 군인이나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관광객의 현지처 노릇을 하며 ‘외화’를 벌어들인 여성들도 다를 바 없었다. <한강>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이들인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는 동안 가족이나 이웃, 친구, 그리고 자기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들은 또 있다. 청계천에서 폐병에 걸려 쓰러지던 미싱공, 매일 몸수색을 당해야 했던 버스 차장, 지문이 없어지는 가발공장 여공,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스테인레스 공장 ‘공돌이’, 달동네에서 목회활동을 펼치는 활빈교회 목사, 그리고 ‘노동자의 예수’로 불리던 전태일….



새 천년, 21세기에 대한 화려한 전망으로 들떠 있는 지금, 조정래씨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라고 물으며 독자들로 하여금 저 개발 독재의 시대를 다시 살게 한다. 하지만 <한강>의 대단원은 미래로 열려 있다. 빨치산의 아들 유일민과 월남한 기업가의 딸 임채옥을 결합시킨 것처럼 ‘한강’이 흘러들어야 할 바다는 겨레의 화합과 통일이기 때문이다.
이문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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