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보다 ‘몸’이 훨씬 소중하다
  • 부산·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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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돔 서약식’ 참여한 젊은이들이 말하는‘행복한 성’
이번에는 콘돔 서약식이다. 지난해 새로 창간한 웹진 <월장>을 통해 대학 내 군사주의 문화(일명 예비역 문화)를 고발했다가 가공할 사이버 테러를 당하며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던 부산대 여학생들이 오는 5월20∼25일을 학내 성(性) 특별 주간으로 선포했다(<시사저널> 제644호 참조). ‘내 생에 가장 특별한 한 주’라는 이름으로 치러질 이번 행사에서 단연 백미는 22일 열리는 콘돔 서약식. 서약에 참여하겠다는 여학생 4명(박김혜정·손김현정·이석윤미·최희윤)과 남학생 3명(류성효·이호상·허현영)을 미리 만나 보았다.





기자:이번 행사가 일차적으로 순결 서약식을 겨냥한 것이라는 말이 있던데요.

이석윤미 :그것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어요. 순결 서약식이나 콘돔 서약식이나 촌스럽긴 마찬가지라는 거죠(웃음). 그렇지만 총여학생회 차원에서 신입생을 대상으로 성교육을 하다 보니 순결 교육의 폐해를 이대로 둘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희윤 :지금은 없어졌겠거니 했는데 올해 새로 들어온 02학번까지도 고교 때 순결 서약식을 했더라고요. 순결 서약 하고, 사탕(순결 캔디) 받아 먹었던 것까지는 좋은데 ‘지금 와 생각하니 뭔가 찜찜해’ 이런 생각을 하는 후배들이 많았어요.

기자 :순결이 나쁜 것은 아니잖아요?

박김혜정 :물론 나쁘진 않죠. 그렇지만 도대체 순결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순결이란 결국 질 삽입이 기준 아닌가요? 질에 남자 성기가 삽입되는 순간 여자는 순결을 잃는다, 이런 식이죠. 그렇다면 원치 않는 강간을 당한 여성은 순결을 잃은 것이고, 온갖 애무 행위를 다하고도 성기만 질에 넣지 않으면 그 여성은 순결한가요?

류성효 :‘남자라면 누구라도 순결한 여자를 원한다’는 얘기를 흔히 하죠. 그런데 그게 과연 사랑 때문일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관심을 갖는 건, 몸이 정체성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잖아요. 그렇다면 그 사람의 몸이 살아온 경험 또한 존중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를 못해요.‘사랑하는 여자의 몸=내 것’이라는 그릇된 소유욕 때문에 남자들이 순결을 그렇게들 밝히는 것 같아요.

이석윤미 :더 큰 문제는, 그놈의 순결 교육에 눌려 성을 제대로 아는 여학생이 거의 없다는 거에요. 심지어 콘돔이 먹는 피임약인 줄 알았다는 신입생도 있더라니까요.

일동 :우--, 너무했다.

박김혜정 :저 또한 대학생들이 그렇게까지 무지할 줄 몰랐어요. 이번에 콘돔 서약식을 한다니까 어떤 남학생이 총여학생회 자유게시판에 자기는 자연 주기법을 쓸 텐데 왜 자꾸 콘돔을 강요하느냐는 글을 올렸어요. 그게 결국 여자 몸 망가뜨리는 길이잖아요. 피임에 대한 이같은 무지 때문에 몸과 마음을 다친 친구들을 주변에서 너무 많이 보았어요. 기혼 여성도 3분의 2는 낙태 경험자라면서요?

최희윤 :무지할 만도 해요. 남자들은 성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모두가 도사인 척하죠. 반대로 여자들은 알면 알수록 ‘노는 여자’ 취급을 당할까 봐 몸을 사리게 돼요. 결국 성을 터놓고 얘기할 공간이 없는 거죠.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대학에서마저.

류성효 :맞아요. 남자들이 안다고 해도 제대로 아는 게 아니에요. 남학생들은 대부분 포르노 를 통해 성에 눈을 뜨기 때문에 막상 진짜 상대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요. 어떻게 해야 상대를 즐겁게 해줄 수 있을지, 그저 눈앞이 깜깜한 거죠.

이석윤미 :어휴, 저 피곤한 강박 관념. 도대체 남자들은 왜 여자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몰라. 제 몸이나 제대로 알고 즐겁게 해 주지 말이야(웃음).

기자:그렇다면 여기 모인 분들은 앞으로 반드시 콘돔을 쓰겠다는 서약을 하는 건가요?

류성효 :(농담조로) 나는 지금 애인이 없어서 서약할 자격이 있나 모르겠네.

이석윤미 :야, 너까지 그렇게 헛소리하면 어떡해? (웃음)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제일 힘든 게 저런 오해들이에요. 쟤들은 프리섹스주의자다, 혼전 섹스를 조장하는 애들이다, 그런 식으로 뒤에서 수근대는 거죠.

허현영 :대학생이 뭐 어린앤가요? 성 문란을 조장한다고 조장되나? 이제는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나이가 됐잖아요.

박김혜정 :콘돔 서약은 단순히 임신을 막겠다는 의미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서로의 몸과 성을 사랑하고 책임지겠다는 일종의 인간 존중·생명 존중 선언이지요. 특히 여성의 경우 ‘콘돔을 사용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자기 몸, 나아가 자기 삶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각오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회 :캠퍼스에 콘돔이 등장하는 데 대해 거부감도 있을 법한데요.

손김현정 :사실 콘돔이 등장한 게 우리 학교가 처음은 아니에요. 1990년대 초 서울 지역 대학가에서 활성화한 ‘성 정치 문화제’ 같은 데서도 콘돔이 단골로 등장했지요. 그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안팎에서 말이 많은지, 우리 스스로도 어리둥절해요.

박김혜정:피임 서약식도 아니고 콘돔 서약식이라는 말로 아젠다를 집약하다 보니까 반향이 더 거센 것 같아요. 일종의 사회적 금기를 깼다고나 할까요. ‘보수적인 부산에서 우째 이런 일이?’라는 식의 호기심도 일부 작용한 것 같고요.

이호상 :기이하게도 이번 행사를 반대하는 학내의 유일한 목소리는 공대 남학생들로부터 나오고 있어요. 그것도 콘돔 서약식 자체를 반대한다는 게 아니에요. 왜 하필이면 우리 건물 앞에서 그런 행사를 함으로써 수업권을 침해하느냐, 이런 식이죠.

손김현정 :그 때문에 우리가 점심 시간에 앰프를 쓰지 않고 행사를 하는 걸로 양보했어요. 선언식 같은 것도 하지 않기로 했고요. 단지 콘돔 선언에 동참하겠다는 사람들이 손바닥 도장을 찍는 퍼포먼스 형식으로 행사를 진행하겠다는데도 막무가내에요.

이호상 :어찌 보면 본질을 비켜간 거죠. 솔직히 이 행사가 재수없기는 한데 그렇게 말했다가 시대에 역행하는 모습으로 찍히는 건 싫고, 그렇다고 자기네 영역이라고 믿고 있던 곳에서 이런 행사가 벌어지는 것은 더더욱 싫고. 그렇다 보니 감정적인 트집만 계속 잡고 있는 거죠.

이석윤미 :그렇지만 우리가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대한여의사회·에이즈예방협회 같은 데서 피임 자료나 콘돔을 먼저 보내주겠다고 연락해 와 너무 뿌듯했어요. 정부기관도 못한 일을 대학생들이 해냈다며 전화로 격려한 시민들도 있었고요.

손김현정 :성이 언제까지나 은장도로 지켜야만 하는, 암울하고 부끄러운 것이어야 하나요? 우리는 모든 미혼·기혼 남녀와 더불어 신나고 재미있고 당당한 성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콘돔 서약식은 그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안전한 성, 행복한 성(Safe Sex, Happy Sex)’이야말로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일 테니까요.



콘돔 서약서


저는 서로의 몸을 존중하는 성관계를 지향합니다.

저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내가 사랑하는 여성에게 힘겨움을 가져다 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콘돔 사용은 단순히 임신만을 막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인간에 대한 예의라 생각합니다.


성에 관한 이야기가 추한 것이 아닌 공개적 장에서 하나의 담론으로 다양하고 깊이 있게, 다양한 성정체성을 인정하고 남녀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부산대 경제학과3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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