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고려 시대 ‘서울’은 어디로 갔나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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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정도 이후 ‘6백년 기록’ 위주로 전시…‘최 첨단 열린 박물관’ 빛 바래
"이곳은 국내 최초의 도시 역사 박물관이다. 충분히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김종현 서울역사박물관 전시지원과장) “그간 들인 시간과 비용에 비해 결과물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나선화 이화여대 박물관 학예실장). 지난 5월21일 경희궁 터(서울 종로구 신문로)에서 개관한 서울역사박물관을 놓고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설립 얘기가 처음 나올 때(1985년)부터 기대를 모았던 박물관이다. 그로부터 무려 17년 만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기존 박물관과는 분명 차별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단은 공간 설계부터가 그랬다. 이 박물관에는 울타리가 없다. 서울 도심의 광화문 거리를 걷다가 불쑥 만나게 되는 이 박물관은 광장이 마치 편안한 앞마당처럼 느껴진다. 말 그대로 ‘열린, 이웃 박물관’이다.




전시 방식도 독특하다. 이 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진열대는 각도가 제각각이다. 벽에 나란히 일렬로 붙지 않고 각도를 약간씩 틀어 자유롭게 서 있는 진열대 덕에 관람객은 전시품을 사방팔방에서 뜯어볼 수 있다. ‘터치 뮤지엄’ 등 최첨단 기기를 재치 있게 활용한 것도 이 박물관의 강점이다.


개인과 역사의 유기적 연관성 못 보여줘


그러나 문제는 이 박물관이 가장 핵심적인 주제, 곧 도시 역사 박물관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의 런던 박물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도시역사박물관, 일본의 에도-도쿄 박물관, 홍콩 역사박물관 등에서 알 수 있듯 도시 역사 박물관 건립은 이미 세계적인 추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뒤늦게 생겨난 서울역사박물관이 무엇보다 서울의 역사를 정도(定都) 이후 6백 년으로 한정짓는 듯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나선화씨의 지적이다. 실제로 △서울의 모습 △서울 사람의 일상·경제 생활 △서울의 문화 △도시 서울의 발달 네 영역으로 이루어진 상설 전시관의 상당 부분은 조선 시대 유물을 전시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이를테면 ‘서울의 모습’은 조선 시대 한양의 지도를, ‘서울 사람의 생활’은 조선 사람의 생활용품을 모아놓은 식이다. ‘서울의 문화’ 전시실에서 가장 공을 들인 듯한 섹션 또한 조선 궁중 문화를 재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서울역사박물관이냐, 조선왕조박물관이냐’는 비아냥마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박물관측은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아 달라고 주문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처음부터 기존 유물 중심 박물관과 달리 주제 중심 박물관을 지향했다고 김종현 전시지원과장은 말한다. 곧 선사∼중세∼근대 순으로 유물을 늘어놓기보다 자연환경·경제·문화처럼 특정한 테마를 부각함으로써 서울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려 한 신개념 박물관이 바로 역사박물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설명과 달리 실제 전시관은 여전히 민속박물관식 전시 방식을 답습했다는 것이 박물관 컨설턴트 김정화씨(뮤지엄스코리아 대표)의 지적이다. ‘옷이면 옷, 도자기면 도자기’ 모든 것을 늘어놓아야 안심하는 구태가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장 큰 폐해는 역사박물관이라는 곳에서 역사와 개인의 유기적 연관성을 깨닫기 어렵다는 점이라고 김씨는 비판한다. 전시관에 진열된 것은 ‘박제된 과거’일 뿐,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관람객들은 알지 못한다. 자국 역사의 일부로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 살던 미국계 일본인의 생활상까지 보여주는 미국 역사박물관 식의 발랄한 상상력을 이곳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런데 역사박물관이 처음부터 이렇게 설계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서울시가 1995년 발행한 <시립박물관 전시기본계획>을 보면, 새 박물관은 선사 시대∼현대를 아울러 보여주게끔 되어 있었다. 한강 발원지 부근에서 출토된 석기 시대 유물, 풍납토성·몽촌토성처럼 서울이 백제의 도성이었던 당시의 유적, 고려 왕조의 한양 천도 움직임 등에 대해서도 별도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전시물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늘날 사진 패널 한 장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행정 파행·예산 낭비 책임 추궁해야


뿐만 아니다. 애초에 1992년으로 예정되었던 역사박물관 개관 일정이 10년 가까이 늦추어진 이유 또한 석연치가 않다. 물론 박물관을 짓는 데 신중을 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외국도 20∼30년은 투자한다. 그렇지만 역사박물관의 파행은 따지고 보면 계획 단계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미술 평론가 성완경씨(인하대 교수)는 진단한다.




애초에 서울시는 박물관 겸 미술관을 구상했다. 곧 현재 건물을 시립박물관과 시립미술관이 나란히 나누어 쓰게끔 구상한 것이다. 그런데 건물 공사가 거의 끝나 가던 1996년 말 서울시는 돌연 시립미술관을 서울 정동에 있는 옛 대법원 자리로 옮긴다고 결정했다. 설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경희궁 터를 부지로 선정한 것 또한 무모한 결정이었다. 당시에도 일부 여론은, 언젠가는 복원해야 할 궁터에 새 건물을 짓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단국대에 지표 조사를 의뢰한 결과, 건물이 들어설 지역과 궁터 사이에 연관이 없음이 밝혀졌다며 박물관 건립을 강행했다. 문제는 공사 착수 이후 발생했다. 초창기 시립박물관의 마스터플랜을 작성한 건축가 김 원씨는, 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중요한 유구(遺構;옛 건물의 잔존물)들이 발견되어 당혹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임금이 마실 물을 긷던 어정(御井), 금천교 등이 그것이었다. 결국 설계는 이를 피해 다시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이들 유구는 역사박물관 중간 뜰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정의 난맥상과 예산 낭비에 대해 책임지는 이는 없다. 그 결과 시민들은 오늘날 내 돈으로 지어진 박물관을 돌아보며 정체 모를 소외감에 사로잡힐 뿐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분명 기존 국·공립 박물관에 비해서는 진일보했다. 이곳이 진정한 시민의 박물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인지, 근본적인 전시 철학부터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선화씨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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