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생각하고 자연과 사귄다
  • 경남 함양·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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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 고택 한옥 체험/“전통 가옥 아름다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왜안방 천장은 낮고, 대청마루 천장은 높을까요?”
신영훈 한옥문화원장이 물었다. 대청마루에 줄지어 앉은 학생들은 누구 한 사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침묵이 흐르는 사이 앞마당 소나무 위로 바람이 건듯 지나갔다.





지난 8월15∼18일,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있는 일두 정여창 선생(1450∼1498) 고택(古宅)에서는 한옥문화원이 주최한 ‘한옥과의 만남’ 행사가 열렸다. 정여창 선생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세자의 스승까지 지낸 이름난 문신(文臣)이다. 그가 살았던 개평리 가옥은 단아하고도 기품 있는 구조로 오늘날 전통 가옥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수 답사 코스가 되어 있다.


참가자 55명의 면면은 다양했다. 서양 건축 위주의 학과 커리큘럼에 아쉬움을 느껴 왔다는 건축학 전공자를 비롯해 어릴 적 뛰놀던 할아버지의 한옥을 다시 한번 체험해 보고 싶다는 대학생,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이제는 지식으로 승화시키고 싶다는 직장인, 민속 마을의 박제화한 한옥이 아니라 삶이 느껴지는 한옥을 만나고 싶다는 가정 주부 등이 가족과의 휴가를 반납하고 이 캠프에 합류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한옥 열풍이 실감 나는 현장이었다.


낮으면 기가 눌리고 높으면 허해진다


이들 참가자를 앞에 놓고 신영훈 원장은 먼저 한옥을 ‘사람이 기준이 된 집’이라고 설명했다. 이를테면 솟을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으로 마주하게 되는 이 집 사랑채부터가 그랬다. 장대한 규모로 우뚝 솟아 있는 사랑채는 기묘하게도 대문으로부터 삐뚜름하게 서 있다. 대문의 축과 같은 선상에 주요 건물을 배치해야 한다는 서양 건축의 상식에서 보자면 이는 매우 낯설고도 당혹스러운 포치(布置) 방식이다. 그러나 집 주인 처지에서라면 이상할 것이 없다. 사랑채와 대문을 이렇게 배치해 두면, 사랑채에 앉아서도 대문 동정을 다 파악할 수 있다. 곧 대문에 누가 들어서는지, 추수한 곡식은 얼마나 드나들고 있는지 한눈에 집안의 속내를 꿰뚫어볼 수가 있는 것이다.





대청마루 천장에 비해 안방 천장이 낮은 비밀도 사람 몸뚱이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풀린다. 곧 안방은 앉은 사람, 대청마루는 선 사람의 키를 기준으로 설계가 된 것이다. 측간은 측간대로 쭈그리고 앉은 사람의 키가 기준이 된다. 천장이 너무 낮으면 사람의 기가 눌리고, 반대로 너무 높으면 사람의 기가 허해진다는 철학에 근거해 옛 사람들은 이처럼 방 쓰임새에 따라 천장 높낮이를 조절했다. 안방·거실·주방·화장실 할 것 없이 천장 높이가 일정한 오늘날의 아파트와는 근본 철학이 다른 설계법이다.


한옥을 읽는 두 번째 열쇠말은 ‘환경에 순응하는 집’이었다. 둘째 날 강의에 나선 한옥 전문 사진작가 김대벽씨는 정여창 고택의 기와 선이 지리산 지맥인 마을 뒷산과 얼마나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있는지를 사진으로 보여주어 참가자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되바라지게 앞으로 튀어나오지 않고 고샅 끝에 보일 듯 말 듯 숨어 있는 대문 또한 자연에 대항하기보다 순응하려 했던 선조들의 흔적처럼 보였다. 알게 모르게 산을 닮아간 집이 곧 한옥이라고 설명하는 김대벽씨는, 주변 환경을 먼저 둘러보아야지 집안으로 무턱대고 돌진해서는 한옥의 특성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품위 있게 뻗어내린 사랑채의 홑처마, 고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넓은 대청마루 또한 친환경적 구조물이라는 측면에서 재삼 주목되었다. 신영훈 원장에 따르면, 한옥 처마는 태양력을 이용한 일종의 자연 냉·온방 장치이다. 옛 사람들은 해가 가장 긴 하지날 정오와 해가 가장 짧은 동지날 정오에 각각 햇빛 각도를 측정한 다음 여기에 기준해 처마 길이와 각도를 설계함으로써 여름에는 처마가 햇빛을 차단하고 겨울에는 처마가 햇빛을 넉넉히 받아들일 수 있게끔 했다. 마루 또한 처마의 기능을 돕는다. 곧 열 전도율이 낮은 나무 재료의 특성상 여름철 마루는 직사광선의 침범을 막고, 겨울철 마루는 난방열의 손실을 막는 것이다.





이론 강의에 이어 참가자들은 한옥을 직접 실측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비록 자를 쥐고 줄을 치는 법은 서툴렀지만 이들은 한옥의 기둥과 기둥 사이, 문살·난간·마루 구석구석을 기록하며 한옥의 맛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고 감탄했다. 원목재로 쓰인 느릅나무의 질감이 이토록 아름다운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는 서울대 건축학과 3학년 김하나양은 “답사 다닐 때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문짝 하나도 이제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한옥을 개축하는 후배 일을 돕다가 자기가 오히려 옛 집의 깊은 멋에 빠져 캠프에까지 참가하게 되었다는 강태규씨(한성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는 “눈대중으로 대충 지은 것 같은 한옥의 수치가 부위 별로 딱딱 맞아떨어질 때면 경이감마저 느끼게 된다”라고 말했다.


하동 정씨 문중 후손들은 이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정여창 고택 하면 사람들은 기껏해야 드라마 <토지>를 촬영한 곳, 최참판댁 정도를 떠올리곤 했다. 후손들도 가옥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하지는 못했다”라는 정여창 선생의 16대손 정규상씨(50)는 외부에서나마 전문적인 연구에 나서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번 한옥 캠프는 단순히 집 공부가 아니라 근기(根氣, 참고 견디는 정신력) 공부를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젊은 세대는 먼저 가부좌 자세로 생활하는 법부터 익혀야 했다. 한옥 마루에서 좌식 생활을 하면 치질 따위는 깨끗이 낫는다고 주최측이 농 삼아 위로했지만 입식 생활에 익숙한 이들이 하루 반나절 이상 가부좌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은 고문 아닌 고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나흘 간을 잘 버티며 ‘궁둥이로 땅을 다스리는’, 일찍이 없던 경험을 했다. “5백 년 묵은 저택에서 자고 일어난 것만으로도 새 힘이 솟는 것 같다”라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황효순씨는 서양식 디자인에 한계를 느끼던 차에 새로운 영감을 얻어 간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꽃집을 운영한다는 장세형씨는 난생 처음 해 보는 건축 공부가 쉽지 않았다면서도 “할 수 있다면 공부를 더해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한옥에 새 구들을 깔아드리고 싶다”라고 말했다. 장씨는 한옥문화원이 9월 중 개설하는 한옥 건축 전문가 과정이나 일반 과정을 수강할 계획이다(문의 www.hano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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