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가 넘치면 현실이 사라진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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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 강연회 연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


지난 9월28일, ‘미디어-시티 서울 2002’ 국제 학술 심포지엄이 열린 이화여대 법정대 강당. 마지막 발제자인 장 보드리야르(70)의 논문 발표가 끝나자 흥미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연단 위로 여대생 50여 명이 뛰어올라가 그를 에워싼 것이다. 여대생들은 저마다 자기 노트를 펼쳐들고 그의 사인을 받으려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따지자면 이 날 토론에 나선 김정탁 교수(성균관대·언론학)의 말마따나, 진지한 학술 토론회에 천명 가까운 청중이 몰린 것부터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청중은 과연 그의 사상을 이해하고 열광한 것일까? 보드리야르는 지적인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 지성계에서도 난해하기로 소문난 인물이다. 미국 물리학자 앨런 소칼은 <지적 사기>에서 이를 빗대 “보드리야르의 철학을 덮고 있는 번지르르한 말의 베니어 판을 걷어냈을 때 거기에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지 의심스럽다”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 이가 연예인인 양 대중으로부터 사인 공세를 받은 것은 분명 희한한 광경이었다. 이미지의 허상을 비판해 온 그가 이미지의 포로가 된 형국이었다.


예술의 죽음 통찰한 새 논문 발표


이번 심포지엄에 그는 새로 작성했다는 논문 <이미지의 폭력>을 들고 왔다. 이 논문은 6년 전 그가 <예술의 음모>를 통해 제기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을 통해 발표한 <예술의 음모>에서 그는 ‘예술은 죽었다’고 선언해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물론 이전에도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예술이 더 이상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죽어가고 있다는 새로운 통찰을 제시했다. 곧 현대 사회는 미적 포화 상태에 빠져 있으며, 예술이 그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그가 제기한 것은 이미지 과잉 문제였다. 이를테면 그는 텔레비전이 방영하는 이른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진정한 의미의 포르노’라고 공격했다. 이런 류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남녀는 격리된 공간에 갇힌 채 일정 기간 자신의 모든 것을 카메라 앞에 드러낸다. 이들이 노출증 환자라면 시청자는 관음증 환자이다. 텔레비전을 통해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시청자는 저마다 ‘빅 브라더’가 된다. 그러나 이같은 정보 과잉, 이미지 과잉 속에서 막상 현실/실존은 실종된다(CNN을 통해 9·11을 지켜본 시청자들이 비참한 테러 현장이 아닌 거대한 스펙터클의 이미지로 이 사건을 기억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그는 이미지 과잉이 현실뿐 아니라 이미지 그 자체도 죽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뒤샹이 변기를 미술품이라고 전시할 때만 해도 그것은 가치 전복적인 의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가들은 스스로 고유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려 노력하는 대신 현실의 이미지를 빼앗는 데만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재난과 폭력의 이미지를 상업적으로 되풀이하는 사진·광고 따위가 좋은 예다).


이미지는 마르크스 주의자로 출발했던 그가 포스트 모더니스트로 변신한 30년 전부터 꾸준히 천착해 온 주제였다. 지금은 고전이 된 <소비의 사회>(1969년)에서 그는 현대 사회가 실재하는 대상이나 사건이 아니라 이를 재현한 모사물(시뮬라시옹), 곧 가상화한 이미지를 소비하는 사회임을 간파했다. 고유한 이미지(그의 표현에 따르면 ‘성스러운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예술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면서 세계화에 저항하는 해결책이라는 결론은, 그래서 더욱 보드리야르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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