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우는 나쁜 감독인가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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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 망가지자 옹호 세력 급감…평단 ‘침묵의 카르텔’도 재앙 원인


역시나 장선우 감독다웠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성소>)의 패색이 완연하던 지난 9월24일 서울 동숭동 하이퍼텍 나다에서 열린 ‘관객과의 난상 토론’에 참석한 장감독은 특유의 여유 있는 자세로 말문을 열었다. “파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살벌한 청문회 같다.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말아 달라.”


<성소>가 실패한 블록버스터라는 데 대해서는 이미 이견이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 영화 사상 최고 제작비(홍보비 포함 1백11억원), 최다 필름 양(32만 자)을 기록했다는 이 영화가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에서 맨 꼴찌나 다름없는 흥행 출발선을 끊었을 때부터, 아니 개봉 이전 이 영화의 제작 기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제작비가 또 추가되었네, 감독이 잠적했네 하는 얘기가 들릴 때부터 영화판에는 이미 ‘성냥팔이 소녀의 재앙’을 말하는 괴담이 떠돌았다.


그러나 <성소>의 실패가 확인된 뒤에도 영화에 대한 일치된 판결(‘실패한 블록버스터’)과 달리 감독에 대한 평가는 평론가나 관객 모두 양 극단을 달렸다. 그를 옹호하는 측은 ‘거대 자본의 욕망과 장선우의 작가적 결기가 충돌한’ 위대한 실패작이라며 <성소>에 애도를 표시했다. 이에 반해 비난하는 측은, 이 영화를 통해 ‘작가인 척’ ‘깨달은 척’ ‘뭔가 있는 척’ 해온 감독의 실체가 드러나고야 말았다며 이 영화를 ‘액션 신비극’(<성소> 홍보 문구)이 아닌 ‘액션 사기극’이라고 몰아붙였다.


사실 장감독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평단으로부터 거의 만장일치의 지지를 끌어냈던 초기작(<성공시대> <우묵배미의 사랑>)과 달리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수상쩍은’ 영화를 들고 1990년대에 진입한 이래 그는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꽃잎> <나쁜 영화> <거짓말>로 자유분방한 필모그래피를 이어오는 동안 그는 ‘천재 감독’이라는 찬사와 ‘이단아’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곤 했다.


이처럼 격렬한 찬반 양론에도 불구하고 장감독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사람들이 예상할 수 있는 경로를 벗어나는 일을 즐기는’(<영화감독사전>, 씨네21)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성소> 이후에도 그가 평정심을 유지할지는 미지수이다. 관객과의 난상 토론에서 그는 이번 영화를 ‘극장은 가득 차고 논쟁은 썰렁한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성소>는 결국 논쟁만 뜨겁고 극장은 썰렁한 영화가 되어 버렸다.




더 큰 문제는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짓말> 때까지만 해도 영화판은 대체로 그를 감싸려는 분위기였다. 종교 집단과 보수 관객이 그를 포르노 감독으로 매도하는 데 맞서 평단은 표현의 자유를 적극 옹호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윤리적 전선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나쁜 영화>나 <거짓말>에서처럼 영화 외적 이유로 그에게 시비를 걸 사람은 없다. 급기야 장감독은 곁가지가 아닌 본질로 관객에게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처참했다. 블록버스터의 장르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관념적이고 난해하다, 재미없다 같은 비판은 점잖은 축에 속한다. <거짓말>이 논란을 빚을 당시 윤리적으로 장감독을 옹호하면서도 그의 작품 세계가 제도와 싸우다 결국 스스로 망가져 버리는 ‘자해(自害) 활극’의 순서를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제기했던 정성일씨(영화 평론가)는 <성소>에 이르러 아예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無得無說)’는 파탄 선고를 내렸다.


<성소>의 틀을 그대로 비틀어 <시네21>과 월간 <말> 10월호에 각기 다른 버전으로 발표한 정씨의 평문에 따르면, 장감독은 이를테면 ‘벌거벗은 임금님’의 트릭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빈곤한 아이디어, 구멍 난 내러티브, <매트릭스> <툼레이더> 따위를 ‘후진 수준으로 카피한’ 액션과 컴퓨터 그래픽. 이런 문제들을 은폐한 채 영화 막판에 <금강경>과 장자의 ‘호접몽’을 들고 나옴으로써 감독이 관객·평론가로 하여금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척하게 하는(있지도 않은 임금님 옷을 찬양하게 하는)’ 할리우드 액션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정씨의 비판이다.


장선우는 작가주의 감독이 아니다?


이에 반해 장감독을 옹호하는 이들은, 100억원짜리 상업 영화를 만들면서도 ‘자본과의 타협 없이 관철된’ 감독의 작가주의에 높은 점수를 보냈다. <씨네21>에서 정성일씨에 맞서 장감독을 옹호한 영화 평론가 이효인씨는 애초에 표방한 이른바 액션 게임 영화로서는 이 영화가 부족하되 ‘세상을 향한 (감독의) 측은지심’이 영화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것을 <성소>의 미덕으로 꼽았다. 관객과의 난상 토론에 참가한 영화 칼럼니스트 황진미씨는 진지한 감정 몰입을 방해하는 이 영화의 의도된 촌티 내지 경박함이야말로 ‘풍자를 위장한 해탈’을 지향하는 위악적 장치라고 주장했다.

게임광을 자처한 또 다른 일반 참가자는 이 영화가 게임처럼 100명이면 100명 모두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구조를 채택한 점에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이에 대해 장감독은 가상과 현실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매트릭스>와 달리 <성소>는 처음부터 카오스적인 혼돈의 구조, 열린 구조를 지향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성소>의 엉성함은 의도된 장치라기보다 기획력 및 준비 부재에서 말미암은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 영화 평론가 듀나의 지적이다. 영화 평론가 김시무씨는 작가주의를 이유로 장감독을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작가주의라는 개념 자체부터 다시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히치콕이 그랬던 것처럼, 진정한 작가주의 감독이란 자신의 사상이나 스타일을 ‘관념적으로’ 밀어붙이는 감독이 아니라 ‘영화적으로’ 표현해 낼 줄 아는 감독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장감독은 <성소>에서 자신의 생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성소> 이후 영화판에서는 벌써부터 외부로부터 투자비가 격감하고 있다는 하소연이 들린다. 장감독이 이처럼 개인 차원을 넘어 한국 영화계 전반에까지 재앙을 가져오게 된 데는 그간 평단이 보여온 ‘침묵의 카르텔’ 또한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것이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한 평론가의 지적이다. 똑같이 문제 감독이라고 분류되는 김기덕·홍상수 감독 등이 ‘과잉 비평’에 시달려 온 것과 달리 장감독은 기이할 정도로 본격적인 텍스트 비평의 대상이 된 일이 없다.

이것이 장선우라는 ‘영화 권력’을 공격하기를 꺼린 평단의 눈치 보기 때문이었는지, 자신들이 이제껏 옹호해 온 감독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의 권위가 실추할 것을 두려워한 평단의 비겁함 때문이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어찌 되었든 장감독 개인을 위해서나 한국 영화 전반을 위해서나 이제는 제대로 된 ‘장선우 읽기’를 통해 그의 실체와 허상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평론가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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